섬같아 섬등으로 불린 하덕마을
전시장처럼 꾸며 이야기 녹여내
입석마을 신석기 유물 '선바위'
세워 놓은 길쭉한 바위 이색적

악양면은 여름과 가을의 테두리를 지나고 있습니다. 파, 하고 깊은숨을 내뱉으며 바라본 넓은 들판은 푸른 기운이 제법 잦아들고 넉넉한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습니다.

◇넉넉한 악양 들판

들판 풍경을 지키려던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더러 비닐하우스가 보이긴 하지만, 악양 들판에서 벼농사 말고 다른 작물을 키우는 걸 보기 어렵습니다. 혹여나 타지 사람이 땅을 사들여 비닐하우스라도 지으려고 하면 주민들이 그를 찾아가 벼농사를 짓도록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벼농사만 지어야 한다는 강제력은 없지만, 벼농사로 풍성한 풍경 그 자체도 악양면의 큰 자산이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악양 사람들은 인심이 후했습니다. <하동의 구전설화>(하동문화원, 2005년)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걸인이 음력 초하루에 동편 미점리 개치마을에서 첫 집을 시작으로 아침을 먹고 섣달 그믐날 서편 외둔에서 저녁을 먹게 되는데 그래도 들르지 못한 집이 세 집이나 남더라."

악양 들판./이서후 기자
악양 들판./이서후 기자

◇이런 멋진 골목길 갤러리

들판을 가로질러 큰길을 따라가다 도착한 곳은 악양면 입석리 하덕마을입니다. 이 마을은 골목길 갤러리로 유명합니다. 갤러리가 따로 있다기보다는 마을 골목길 전체가 갤러리인 셈입니다. 2013년부터 몇 년간 작가 27명이 마을 이야기를 담아 골목을 꾸몄다고 합니다. 큰 주제는 '섬등'입니다. 하동 사람들은 옛날 섬처럼 뚝 떨어진 하덕마을을 섬등이라고 불렀답니다. 섬 같은 곳이란 뜻이겠습니다. 마을 공용주차장 앞에 간단한 설명이 있어 옮겨봅니다.

"사람이 떠난 집마저 황폐하지 않고 다만, 조용히 눈감고 임자를 기다리는 이 마을의 안길에서 수많은 이야기와 눈물과 하소연을 삼킨 담벼락들이, 녹슨 철문들이, 한걸음 한걸음에 닳은 골목길에서 지금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하덕마을 골목길 갤러리.
▲ 하덕마을 골목길 갤러리.

골목길 갤러리는 단순하게 벽화를 그리는 수준이 아닙니다. 회화에서 조각, 도자기까지 장르가 다양하고, 골목 풍경과도 잘 어우러졌습니다. 무엇보다 작품마다 마을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게 마음에 듭니다. 오래된 집 하얀 벽에 철사로 글자를 만들어 넣은 구인성 작가의 '감사장' 같은 작품이 대표적입니다. 작가가 하덕마을 자체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만든 겁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 마을은 어려운 시대에서도 자연과 함께 터를 일구고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배웠습니다. 힘든 삶은 웃음으로 거친 환경은 순하고 어진 품성으로 마을을 지켜온 당신의 삶에 감사드립니다."

이런 작품들이 아니라도 골목 풍경은 초가을 햇빛과 어우러져 그대로 작품이 됩니다. 정겨운 모퉁이들, 담벼락에 비친 감나무 그림자, 골목 바닥에 떨어져 으깨진 홍시마저도 멋진 풍경입니다.

◇선바위를 찾아서

하덕마을 서쪽 소하천을 따라 마을 뒤편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갑니다. 시멘트길이지만, 너비가 걷기에 적당하니 좋습니다. 주위는 온통 과수원인데, 대부분 배나무와 대봉감이 열리는 감나무입니다. 오르막길을 제법 오르니 갑자기 큰 마을이 나옵니다. 입석마을입니다. 입석리라는 이름이 유래한 마을입니다. 아주 오래된 신성한 선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입니다.

선바위가 아니라도 커다란 바위가 많은 동네입니다. 마치 집집이 큰 돌 하나씩은 품은 것 같네요. 입석마을 회관 앞 너른 마당을 지나는데, 푸른색과 흰색이 신선한 건물을 만납니다. 형제봉 주막이란 간판이 달렸습니다. 처마 아래 붙은 낡은 안내판을 보니 '74 새마을. 협동이발관, 구판장. 1974년 3월 20일 완공'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전국의 오래된 이발관들을 보면 협동이란 이름이 붙은 경우가 많습니다. 1960~70년대 정서가 물씬 풍기는 곳이죠. 형제봉 주막도 그렇습니다.

▲ 입석마을 선바위.
▲ 입석마을 선바위.

그나저나 산 중턱에 이 정도 규모의 마을이 있으리라고는 생각 밖입니다. 신식 주택도 많지만, 흙담집도 제법 남아있습니다. 길고양이들이 사람 겁을 안 내고 다가옵니다. 이 정도면 마을 인심을 알 것도 같습니다.

선바위는 입석마을 뒤편으로 더 높은 산등성이에 있습니다. 어지간히 올라가다 뒤를 돌아보니 악양 들판이 아득하게 펼쳐져 보입니다. 선바위는 길가에서 쉽게 보이지 않아 한 번에 찾기가 어렵네요. 겨우 배 과수원 한가운데 있는 것을 찾았습니다. 선바위는 선돌, 입석(立石)이라고 합니다. 자연 상태의 길고 큰 돌을 수직으로 세워 놓은 것입니다. 신석기시대 유물로 종교적인 뜻이 담긴 것으로 추정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발견되는 거석문화와 맥을 같이하는 거죠.

찾아오는 길 주변으로 수많은 큰 바위를 봤습니다. 선바위가 품은 의미는 자연 그대로가 아니라 '오래된 인위'라는 거겠죠. 뭔가 묘한 모순 같네요.

입석마을 풍경./이서후 기자
입석마을 풍경./이서후 기자
하덕마을 골목길 갤러리./이서후 기자
하덕마을 골목길 갤러리./이서후 기자
하덕마을 골목길 갤러리./이서후 기자
하덕마을 골목길 갤러리./이서후 기자
하덕마을 골목길 갤러리./이서후 기자
하덕마을 골목길 갤러리./이서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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