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년 전 건립된 신라시대 사찰
지리산 명맥 사천 봉명산에 자리
일제시대, 만당 등 독립운동 거점
만해 한용운 독립선언서 초안 써

다솔사는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봉명산 자락에 있습니다. 부산 범어사의 말사입니다. 크거나 화려한 사찰도 아니고, 엄청나게 유명한 곳도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를 가면 왠지 기분이 편안해집니다. 무엇보다 사찰로 들어가는 숲길이 정말 좋아요. 주차장에 차를 대고 슬슬 걸어가면 오른쪽 키 큰 붉은 소나무가, 왼쪽으로 편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다솔사는 일주문이 따로 없는데요, 일주문이 속세와의 경계잖아요. 다솔사는 이 숲 자체가 일주문인 거 같아요. 다솔사는 또 차밭이 유명하죠. 이곳은 '한국 차 문화의 성지'로 불리기도 합니다.

▲ 다솔사 전경.  /경남도민일보 DB
▲ 다솔사 전경. /경남도민일보 DB

◇지리산 명맥을 이은 1500년 고찰 = 사찰이 자리 잡은 모양을 한번 살펴보죠. 하동군 진교면 월운리 이명산에서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봉명산으로 이어지는 산세가 있습니다. 옛날부터 '이명산 산하 십리 안에 만군을 호령할 천자가 나오고, 미래 세계를 이끌어갈 현량들이 모여 마음껏 토론할 수 있는 도량이 생긴다'는 전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기운을 죽이려고 쇠말뚝 정도가 아니라 봉명산과 이명산 근처에 쇳물을 끓여서 부었다는 말도 전합니다. 사천 봉명산은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불립니다. 지리산과 같은 이름이죠? 그만큼 지리산 명맥이 잘 이어진다고 알려진 곳입니다. 이 지리산의 기운을 받는 자리에 천년고찰 다솔사가 있습니다.

다솔사는 경남 사찰 중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라고 합니다. 503년, 무려 1500년이 더 됐지요? 신라의 승려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영악사(靈嶽寺)'란 이름으로 창건을 합니다. 삼국시대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게 676년인데, 그보다도 150년 더 전입니다. 이후에 636년 선덕여왕 때 건물을 더 짓고 다솔사로 이름을 바꿉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676년 의상대사가 다시 '영봉사(靈鳳寺)'라고 했다가, 신라 말기 도선(道詵) 국사가 다시 다솔사라고 부릅니다. 1326년 고려 말에 나옹(懶翁) 스님이 새로 고쳤고, 조선 초기와 임진왜란 이후에도 수리하거나 복원했습니다. 이후에도 불에 탔다가 다시 짓고 그러다가 1914년에 불에 탄 것을 1915년에 복원한 게 지금 있는 건물들입니다. 계속 수리하고, 복원하는 과정이 끊임없는 걸 보니 진짜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찰이었나 봅니다.

다솔사는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의 거점이기도 했습니다. 만해 한용운이 3·1운동 2년 전인 1917년에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쓴 곳이 바로 다솔사입니다. 현재 종무소 오른쪽으로 연결된 건물이 요사채로 쓰이는 안심료입니다. 이곳에서 불교계 대표적인 비밀 항일 조직이죠, '만당(卍黨)'이 결성됩니다. 만당은 1930년 5월 한용운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불교 청년들이 식민지 불교 극복, 불교 자주화, 불교 대중화를 위해 시작한 단체입니다. 다솔사 아랫마을 출신으로 일본 다이쇼(大正)대학 불교과를 졸업하고 당시 다솔사 주지로 있던 최범술(효당 스님), 부산 범어사 만세 운동을 주도하고 민족해방과 불교 혁신에 힘쓴 김법린, 동양철학을 연구해 대한민국 건국 철학과 국민윤리 기반을 닦은 김범부 등이 주축이었습니다. 만당은 다솔사를 근거지로 전국은 물론, 일본 도쿄까지 조직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 소설가 김동리 등이 머물던 다솔사 요사채 안심료.  /경남도민일보 DB
▲ 소설가 김동리 등이 머물던 다솔사 요사채 안심료. /경남도민일보 DB
▲ 다솔사 뒤편 차밭.  /경남도민일보 DB
▲ 다솔사 뒤편 차밭. /경남도민일보 DB
▲ 다솔사 적멸보궁.  /경남도민일보 DB
▲ 다솔사 적멸보궁. /경남도민일보 DB

◇소설의 깊은 배경이 되다 = 매년 10월 즈음에 다솔사에서 김동리다솔문학축제가 열립니다. 문학관도 아닌데 문학축제가 열릴 만큼 다솔사와 김동리는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김동리는 <무녀도>, <역마>, <등신불> 같은 소설을 쓴 소설가입니다.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본 소설들이죠? 1913년 경주에서 태어났고요. 박목월, 김달진, 서정주 시인들하고 친하게 지냈습니다. 경주 불국사 정문 근처에 동리목월문학관이라고 있습니다. 경주 출신인 김동리와 박목월을 기리는 문학관입니다. 김동리는 1935년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화랑의 후예'로 당선됩니다. 그리고 다음해 <동아일보>에는 단편 '산화'가 당선됩니다. 이때 받은 상금을 들고 경주에서 사천 다솔사로 들어옵니다. 여기 칩거하면서 제대로 소설을 써 보자 이런 결심이었어요. 근데 왜 하필 다솔사였을까, 아까 만당 회원 중에 동양철학의 대가 김범부가 있었지요? 이분이 김동리의 친형입니다.

최범술, 김범부, 김동리 모두 요사채 안심료에서 함께 지냅니다. 그런데 김동리가 다솔사에 머물 때 쓴 소설은 사실 하나도 없습니다. 다솔사에서는 그냥 우두커니 시간을 보냈습니다. 매일 바람 소리, 새 소리를 듣고 봄이면 진달래꽃 피는 것도 보고, 근처 장군바위도 가보고, 그리고 아마 친형이랑 그 친구들이랑 철학, 종교 이런 이야기도 심도 있게 했을 겁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이후에 나오는 소설들의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 다솔사 입구 소나무숲. /경남도민일보 DB
▲ 다솔사 입구 소나무숲. /경남도민일보 DB

김동리는 다솔사에서 이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1937년부터는 최범술이 사천에 열었던 야학 광명학원 교사 일을 합니다. 이때부터 해방 때까지 사천에 자리를 잡고 삽니다. 1939년에는 결혼도 하고요. 1941년 일제가 진주만을 기습하면서 태평양전쟁을 일으킵니다. 징용도 더 심해지고, 예술가들을 전쟁 독려 도구로 적극적으로 활용하던 때입니다. 김동리는 이때는 아예 글을 안 썼습니다.

해방이 되면서부터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데요. <무녀도>가 1947년, <역마>가 1948년, <황토기>가 1949년 작품이고요. <등신불>은 1963년에 나옵니다. 이런 소설들에 다솔사의 흔적이 조금 혹은 많이 묻어 있습니다. 특히 <등신불> 이야기를 하면 김동리가 결혼한 1938년 서울에 있던 만해 한용운이 다솔사에 옵니다.

이때 주지 최범술, 김범부, 김동리가 함께 만나는데, 김동리는 처음 한용운을 보는 자리였어요.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용운이 소신공양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요. 김동리가 소신공양이 뭔지 몰랐다가 이때 처음 들었는데, 엄청난 충격을 받았답니다. 사람이 어떻게 몸이 불에 타들어가는 데도 꼿꼿한 자세로 있을 수 있을까! <등신불>에 스스로 몸을 태우는 장면이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 거였죠.

참고 문헌 △<등신불-김동리 단편선>(문학과 지성사, 2005) △<소설로 읽는 경남>(김은영, 선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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