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문명전 창원 성산아트홀서 개막…작가 700명 참가
서예 외 설치 미술·지우개 조각·VR 등 독특한 작품도

그저 대규모로 진행하는 서예 전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은 여지없이 틀렸다. 지우개나 담요가 등장하는가 하면 최신 기술인 가상현실(VR)까지 체험할 수 있었다. 서예 작품이라도 활력이나 의지가 느껴지는 게 신선한 재미가 있다.

지난달 25일부터 창원 성산아트홀 전시동 전체를 통틀어 열리는 2019 문자문명전 이야기다. 1988년 창원 다호리 선사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붓 다섯 자루에서 시작된 전시다.

선사시대 문자 유적이 없는 상황에서 이 붓의 발견은 우리나라 문자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이 의미를 담아 2009년 제1회 문자문명전이 열렸다. 이후 지금까지 11년을 이어왔다.

▲ 창원 성산아트홀에서 독립을 주제로 열리는 2019 문자문명전. /이서후 기자
▲ 창원 성산아트홀에서 독립을 주제로 열리는 2019 문자문명전. /이서후 기자

올해 전시 주제는 '독립'이다. 독립선언 100주년을 기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단순한 기념을 넘어서 '독립'이란 개념이 지금 우리에게 어떠한 실천 강령이어야 하는가를 묻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과거에 대한 주제이면서도 전시 자체는 미래를 지향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이유다.

전시 주제를 도출하고자 <주역>의 28번째 괘 '택풍대과(澤風大過)'를 끌어들였다. 아주 위태로운 형국을 뜻하는데, 이런 위기 상황에서 <주역>은 '독립불구 둔세무민(獨立不懼 遯世無悶)'하라고 이른다. 홀로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에 나아가 있지 않아도 근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700여 명이 참여해 성산아트홀 전시동을 전부 사용하는 큰 전시다. 전시실마다 소주제가 붙었는데, 제1전시실은 유법이무법(有法而無法), 제2전시실과 제3전시실 일부는 독립의지(獨立意志), 제3전시실은 애이불상 낙이불음(哀而不傷 樂而不淫), 제4전시실은 함정조어호단(含情調於豪端)이다. 이렇게 4곳은 특정 주제에 대한 작가들의 해석이 담긴 작품들이 있다.

▲ 창원 성산아트홀에서 독립을 주제로 열리는 2019 문자문명전. /이서후 기자
▲ 창원 성산아트홀에서 독립을 주제로 열리는 2019 문자문명전. /이서후 기자

이 외 제5전시실은 경남 추천 참여 작가와 공모 초대 참여 작가 작품이, 제6, 7전시실은 2019 문자예술공모대전 입상작이 전시된다.

이 중에 김대연, 이정, 정진경, 한소현, 이정희 젊은 작가 5명이 참여한 독립의지 섹션이 특히 눈에 띈다. 서예가가 아닌 작가들이 독립을 주제로, 흰색이라는 색깔 안에서, 다양한 방식의 문자를 사용해 작업한 것들이다. 작가들에게 주어진 주제는 구체적으로 '독립 - 휘둘리지 않는 삶'이었다.

▲ 창원 성산아트홀에서 독립을 주제로 열리는 2019 문자문명전 중 이정희 작가의 담요 원단 작품. /이서후 기자
▲ 창원 성산아트홀에서 독립을 주제로 열리는 2019 문자문명전 중 이정희 작가의 담요 원단 작품. /이서후 기자

예컨대 설치 미술가인 이정희 작가는 흰색 담요 원단에 전국에 있는 독립 기념물 표지석 글자들을 그대로 옮겨왔다. 손으로 쓸어보면 사라질 것 같은 담요 위 희미한 글자들이 꿋꿋하게 남아 있는 모습은 그대로 '독립불구 돈세무민'을 표현한 듯한 느낌이다.

아카이빙(기록보관) 작업을 많이 하는 한소현 작가의 지우개 조각 작품도 굉장히 독특하고 재밌다. 그는 독립이라는 주제에서 독립되지 않은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 교육 문제에 관심이 많은 작가답게 일제에 부역한 음악가들이 만든 교가를 주목했다. 구체적으로 창원, 서울, 광주에 있는 학교 중 친일 음악가가 만든 교가 단어를 모아 빈도가 높은 단어들을 지우개에 일일이 조각했다. 이렇게 전시에 사용된 지우개가 176개다.

▲ 창원 성산아트홀에서 열리는 2019 문자문명전 중 한소현 작가의 지우개 조각 작품. /이서후 기자
▲ 창원 성산아트홀에서 열리는 2019 문자문명전 중 한소현 작가의 지우개 조각 작품. /이서후 기자

그런데 하필 지우개 조각일까. 한 작가가 보기에 친일 음악가가 만든 교가지만, 가사 내용을 보면 좋은 게 많았다. 좋은 개념이지만 그동안 학교 교육은 일방적으로 이를 가르쳐왔다. 그래서 견고하고 전통적인 교육 속 개념을 일상적이고 친숙하고 크기도 작은 지우개에다 담아 뒤집어 보려고 했다. 같은 단어라도 주체적으로 의식하고 해석하자는 취지다.

다양한 설치 작업을 하는 정진경 작가의 VR 작품도 눈길을 끈다. 특히 26일 개막식에서 정 작가가 진행한 보디페인팅 퍼포먼스는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 지난달 26일 창원 성산아트홀에서 열린 2019 문자문명전 개막식에서 선뵌 정진경 작가의 보디페인팅 퍼포먼스. /이서후 기자
▲ 지난달 26일 창원 성산아트홀에서 열린 2019 문자문명전 개막식에서 선뵌 정진경 작가의 보디페인팅 퍼포먼스. /이서후 기자

이번 전시는 창원문화재단과 (사)한국문자문명연구회가 준비했다. 경남도립미술관 관장인 김종원 서예가가 2009년 처음 문자문명전을 기획한 이다. 그는 직전 한국문자문명연구회장으로 이번 전시 준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전시는 5일까지. 문의 055-261-2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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