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요리·방송까지 숨은 실력자 많아
100세 시대 섬세한 고령화 정책 나오길

100세 시대라고 한 지가 엊그제인데, 이젠 120세 시대라고들 한다. 100세 시대에 걸맞게 산다고 가정하면 난 아직도 50여 년이 남은 셈이다. 현재 일반 직장인의 퇴임 정년은 60세다. 하지만 현 정부가 65세로 늘리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하니 제2의 인생 준비 기간이 조금은 늘어날 수도 있겠다 싶다.

돌이켜보면 친정아버지는 매우 아까운 분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글씨와 그림에 조예가 깊고 소질이 특별났다. 관운이 없어 결혼 후에도 직업을 여러 번 옮기다가 경제력을 갖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그런 삶의 힘겨움을 '명필'로 승화하곤 했다. 식당 운영으로 힘든 나날이었음에도 친정엄마는 아버지가 화선지를 꺼내 서진(書鎭)으로 고정하는 것을 보면 그 옆에 가서 묵묵히 먹을 까맣게 갈아주곤 했다. 그렇게 완성된 아버지의 추사체 비슷한 서예 작품은 삼남매 집 이사 선물이었고, 지인들에겐 술값 대신이었다. 여름이 되면 무늬 없는 부채를 사다가 붓으로 소나무와 매화를 그리고 두보 시를 쓴 합죽선을 주셨는데, 그렇게 운치가 있었다.

이런 재능이 아까워 나는 4년 전쯤 아버지에게 개인전을 하자고 강권했다. 아버지는 선뜻 그러자고 해놓곤 평생 검증받지 못한(서예대전 공모를 해보지 않았기에) 작품 전시를 하려니 꽤 신경이 쓰이는지 1년 넘게 준비 작업을 하는 듯했다. 하지만 1년 후 몸이 쇠약해지면서 끝내 전시회를 하지 못하고 말았다. 더욱이 돌아가시고 나니 생존 때 지녔던 아버지의 아까운 능력은 바로 증발해버렸다. 남은 작품이라고는 이사 선물과 합죽선이 전부다.

지난 23일 창녕 부곡에 사는 90세 조미수 할머니 화가를 취재하면서 아버지가 떠올랐다. 할머니는 혼자서 취미로 그림을 그려왔지만 그림 실력이 뛰어났다. 내가 개인전을 해도 좋겠다고 권하자 할머니는 그랬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할머니 소망이 간절했는지, 24일에 기사가 보도된 후 김해와 부곡 두 갤러리 관계자들이 할머니 개인전을 열어줄 의향이 있다고 연락이 왔다. 참 고마운 일이다. 100세 시대라고 하면, 할머니가 아직 건강하시니 개인전을 하고도 더 오래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라 나는 믿는다.

조미수 할머니, 친정아버지뿐 아니라 대부분 노인의 아까운 능력이 빛을 보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부모, 시부모, 시골 노인들 개인마다 하나쯤은 소질 있는 게 있을 것이다. 평생 부엌에서 살았던 어머니들의 음식 솜씨는 그야말로 예술이지 않은가.

요즘은 나만의 농사, 원예, 공예, 슬로푸드(된장·간장·고추장) 요리 실력 등이 관심을 끌고 인기를 구가하는 시대다. 실제 1인 방송으로 용기 있고 입담 좋은 노인들이 자신 재능을 뽐내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내 주변 노인들은 소극적이고 겸손하다. '이걸 능력이라고 할 수 있나?'라고 자기 삶의 가치를 낮게 평가해버리는 노인들에게 용기를 주는 더욱 섬세한 고령화 정책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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