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활동 탓 숨겨오다 공적 재조명 덕에 다시 모여
창원 오동동 생가터 찾은 16명 "독립운동활동에 자부심 느껴"

"김명시 누님의 영혼이 오늘 이 자리를 웃으면서 보고 계실 겁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서 '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렸던 김명시(1907∼1949) 장군의 외사촌 김재두(87) 씨가 감격스러워했다. 이들 친족이 21일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문화광장 뒤편에 있는 김 장군 생가터에 모인 것이다.

김 장군 친족들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집안임을 밝힐 수 없던 시대에 살며 후손임을 드러내지 못했다. 지난해 정부가 여성과 사회주의 활동가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을 확대하기로 함에 따라 열린사회희망연대는 지난해 12월 11일부터 올해 1월 31일까지 <경남도민일보> 광고를 통해 '김명시 장군 친족찾기운동'을 했다.

▲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인 김명시 장군 친가와 외가 친족들이 21일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문화광장 뒤 김 장군 집터에서 120여 년 만에 만나고 있다.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인 김명시 장군 친가와 외가 친족들이 21일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문화광장 뒤 김 장군 집터에서 120여 년 만에 만나고 있다.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이를 확인한 김 장군 외사촌인 김필두(81·전 마산시의원) 씨가 2월 희망연대 사무실을 방문했다. 희망연대는 김필두 씨와 친족 관계 확인 작업을 진행했고, 7월 김 장군 큰아버지의 손녀인 김미라 씨가 거제에서 연락을 주면서 친족찾기운동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21일 희망연대가 주관한 '김명시 장군 친족 기자간담회'에는 김명시 장군 아버지 쪽, 어머니 쪽 친족 16명이 자리를 같이했다. 김영만 희망연대 상임고문은 "김군준(1849∼1893) 씨 아들(김봉권)과 김봉욱(1858∼1943) 씨 딸(김인석)이 결혼해 김 장군 등 오남매를 낳았다. 120년 만에 양가 친족이 만난 뜻깊은 날이다"고 설명했다.

친족들은 김 장군의 어릴 적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방 전후 몇 번 만남이었기 때문에 남아있는 기억이 많지 않다. 그래도 윗대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릴 때 명시 누나를 몇 번 봤던 기억이 있다. 해방 이후 마산에 왔을 때 몇 번 보았다."(친사촌 김형도(91) 씨)

"아버지로부터 명시 고모가 교도소에서 오랫동안 생활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시대가 바뀌어 이런 자리가 만들어지니 고모가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이 있다."(오촌조카 김향임(73) 씨)

▲ 김명시(오른쪽) 장군과 동생 김형윤.
▲ 김명시(오른쪽) 장군과 동생 김형윤.

"형윤(김명시 장군 동생) 형님과 부인·아이들이 외삼촌 되는 아버지를 찾아와 서울로 간다며 절을 하고 갔다. 고모·고모부(김 장군 부모)는 자식들이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제사를 모셨다. 해방 후 형윤 형님이 마산에 있어 3년가량 모시다 6·25전쟁 직전 서울로 올라간 것이다. 그 뒤로 내가 결혼해 제사를 모셨는데, 형윤 형님 자식들이 살아 있다면 할아버지 제사를 알고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북으로 간 듯해 혹여나 이산가족 찾기를 해서라도 찾고 싶지만 막연하다."(외사촌 김재두 씨)

각자의 기억을 꺼낸 가운데, 김필두 씨는 1925년 김 장군이 고려공산청년회 유학생으로 선발돼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려고 떠나기 전 동생 김형윤 씨와 찍은 사진을 공개했다. 김필두 씨는 여러 사진이 있었지만 김형선(김 장군 오빠·1904∼1950) 선생으로 추정되는 사진과 이 사진만이 남아있다고 했다.

김 장군의 언니(김선이) 후손은 경기 이천에 거주하고 있고, 여동생(김복수) 후손은 경북 상주에 사는 것으로 확인됐다. 김 상임고문은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한 김 장군 형제로 친족들이 생활에서나 심리적으로나 피해를 많이 입었다. 김 장군 언니와 여동생 후손과는 연락이 닿았지만, 외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고 안 만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해 가슴 아팠다. 한 집안의 비극이자 우리 민족의 비극이다"고 말했다.

희망연대는 지난 1월 경남동부보훈지청에 김 장군의 서훈 신청을 위한 서류를 제출했고, 현재 국가보훈처 공훈발굴과에서 심의 중이다.

 

◇김명시 장군은 = 김명시 장군은 1907년 마산부 만정(창원시 마산합포구 동성동) 189번지에서 태어났다. 김 장군 가족은 독립운동가가 많다. 어머니는 마산 3·1운동에 앞장서 만세를 부르다 부상당했다. 오 남매 중 삼 남매(김명시·오빠 김형선·남동생 김형윤)는 사회주의 계열 항일투사로 모두 옥살이를 했다. 김 장군은 중국에서 조선공산당 재건 책임자인 홍남표·조봉암과 함께 중국공산당 상해한인특별지부 조직 임무를 맡았다. 1930년 5월 하얼빈 일본영사관을 습격했다 체포돼 징역 7년을 살았고, 출옥 후 조선의용군(조선독립동맹 산하 군사조직)에 들어가 항일 무장투쟁 최전선에서 여자부대를 지휘했다. 김 장군은 해방 후 북로당 정치위원이 됐고, 1949년 10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부평경찰서에 구속됐다가 유치된 지 이틀 만에 목을 매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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