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 건드린 두 줄 문장에 국제정세 요동
미 국방부 전략 보고서에 대만 국가 인정 표현 사용

미국과 중국의 대결이 점입가경이다. 중국이 '희토류(희귀 금속원소 17개) 수출 금지'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미국 산업을 압박하는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하나의 중국 원칙 깨트리기' 카드로 맞대응하면서 신경을 자극하고 있다.

현지 시각으로 지난 1일 미 국방부는 <인도·태평양 전략 보고서(Indo-Pacific Strategy Report)>를 발행했다. 여기서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표현이 사용됐다. 그간 미국이 '중국의 일부'로 간주했던 타이완(대만)이 국가로 인정된 것이다.

"인도·태평양 민주주의 국가들인 싱가포르·타이완·뉴질랜드·몽골은 합중국의 신뢰할 만하고 저력 있으며 순리적인 파트너들이다. 네 국가 모두(All four countries) 세계적으로 수행되는 미국의 임무를 도우며, 자유롭고 개방된 국제질서를 유지하는 데 적극적 조치를 취하고 있다."

▲ 지난 1일(현지 시각) 미 국방부가 발행한 <인도·태평양 전략 보고서> 표지.

지난 1월 28일 하얀 콧수염이 인상적인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중국은 붉은색, 타이완은 하얀색으로 표기된 세계 지도 앞에 서 있는 사진이 화제가 됐다. 중국과 타이완을 별개의 국가로 취급하겠다는 암시였다. 그러더니 지난 1일에는 국방부 보고서를 통해 한 단계 높은 암시가 나타난 것이다.

1949년 건국 이래 중국은 '중국 전체는 하나이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전 중국을 합법적으로 대표한다'는 원칙을 견지했다. 이는 중국 정부의 변함 없는 대원칙이 돼왔다. 그런 대원칙을, 미국이 타이완을 국가(country)로 표기함으로써 무시해버린 것이다.

◇중국의 원칙, '하나의 중국' =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무시하는 국가와는 일절 수교하지 않았다. 타이완과 국교를 체결한 나라와는 절대로 수교를 맺지 않았다. 1992년 한중수교도 한국과 타이완의 관계 단절을 전제로 이뤄졌다.

이제까지 그 원칙에서 한 치의 벗어남도 없었으니, 미국이 보고서 발간에 그치지 않고 정말로 타이완과 수교한다면, 중국으로서는 미국과의 관계 단절을 검토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미국에 대해서만 예외를 인정할 수는 없으니, 미국이 정말 그렇게 한다면 중국은 심각한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 이 원칙에 목숨을 걸어온 중국 입장에서는 이번 보고서 발간이 가슴을 후벼 파는 일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을 법하다.

미국의 행동을 방치하게 되면 다른 나라들도 모방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이 다른 나라들을 그 방향으로 유도할 가능성도 있다. 희토류 수출 금지로 미국 산업이 입을 고통 못지않은 것을 중국도 겪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얼마나 중시하는지는 1979년 미중 수교에서도 명확히 드러났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과 미중 상하이 공동성명 채택으로 조만간 성사될 것 같았던 양국 관계정상화가 1979년에 가서야 마무리된 원인도 거기에 있다.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임기 도중에 하차하는 바람에 지연된 측면도 있지만, '하나의 중국' 원칙에 관한 입장 차이도 국교 체결을 지연시키는 중대 원인이 됐다.

중국은 미국이 이 원칙을 따라줄 것을 요구했다. 타이완과의 국교도 단절하고 동맹관계도 파기하고 미군도 철수시킬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미국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1970년대 후반에 소련의 팽창 정책이 가속화되자, 중국과의 공동 대응 필요성 때문에 하나의 중국 원칙을 서둘러 인정하고 수교를 마무리했다.

1960년대 중후반만 해도 중국은 핵개발 문제 때문에 미국의 압박을 받았다. 경제제재는 물론이고 미국·소련·영국의 외교적 압박까지 받았다. 케네디 대통령 때는 미국이 전쟁을 검토하는 일까지 있었다. <미국사연구> 제33권에 실린 김정배의 '케네디 행정부의 중국 정책 그리고 냉전체제'는 케네디 대통령이 "(중국) 핵시설에 대한 예방적 혹은 선제 타격"을 검토했다고 전한다.

그처럼 중국을 압박했던 미국은 베트남전 문제로 곤란에 빠지자 중국의 핵 보유를 공인해주고 관계 정상화를 추진했다. 1971년에는 타이완을 몰아내고 중국을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에 앉히기도 했다. 미국의 태도 변화는 제재와 압박을 받아온 중국한테는 뜻밖의 대반전이었다. 오랫동안 목 말랐던 중국이 미국으로부터 '생수병'을 건네받는 것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중국은 '생수병'을 덥석 받아들지 않았다. 미국과의 수교를 성급히 결정하지 않았다.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인정할 건지 말 건지를 따져물었다. 1972년에 곧 성사될 것 같았던 미중수교가 7년 뒤에야 이뤄진 결정적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인정해줘야 생수병을 받겠다면서 시간을 지연시킨 결과였다.

이 정도면 중국이 '하나의 중국'에 얼마나 집착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세계 최강 미국이 핵보유를 합법화해주고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만들어주는데도, 중국은 이 원칙 하나를 위해 수교를 7년간이나 지연시켰다. 세계 최강과 척을 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 원칙만은 꼭 지키겠다는 중국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중국이 '하나의 중국'에 집착하는 이유 = 중국은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나라다. 소수민족들은 인구는 많지 않지만, 이들이 차지한 영역은 상대적으로 넓다. 소수민족이 중국에서 분리되면 그 민족이 차지한 영역까지 분리될 뿐 아니라 여타 소수민족들한테도 영향을 줄 수 있어, 자칫 중국 전체가 대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없지 않다.

역대 중국 왕조들이 소수민족 통합에 각별히 신경을 쓴 것은 그런 위험성을 배제하기 위해서였다. 중국이 이민족의 중국 침략까지 중국 역사의 일부로 간주하는 데는 그런 고려도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역대 중국 왕조들은 거란족(요나라)의 중국 침략 역사를 <요사>라는 공인 역사서로 포용하고, 몽골(원나라)의 중국 침략 역사를 <원사>라는 공인 역사서로 포용했다. 어떤 경로로 중국에 들어왔든 모두 다 중국의 일원으로 인정해줌으로써, 그들이 분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려는 중국 한족 지배층의 심리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늘날의 중국이 '하나의 중국'을 고수하는 것은 비단 타이완뿐 아니라 신장위구르·티베트·내몽골·만주·서남지역 소수민족들을 다독이고 분리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태평양 전략 보고서> 같은 문건들이 국제적으로 공론화되면, 중국은 미국이나 타이완뿐 아니라 소수민족 동향에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중국 지도부의 정신적 역량이 사방으로 분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미 국방부 보고서 30쪽에 대만을 국가로 인정한 표현이 쓰였다.

◇차근차근 시진핑을 '건드려온' 트럼프 = '하나의 중국' 원칙이 그처럼 민감하기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은 이를 단번에 깨지 않고 단계적으로 건드리는 접근법을 구사하고 있다. 대통령 당선 1개월도 채 안 된 2016년 12월 2일, 트럼프는 '대통령이든 당선자든 대만 총통과 접촉하지 않는다'는 1979년 이래의 불문율을 깨고 차이잉원 타이완 총독과 전화 통화를 했다. 그후 그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살짝 살짝 건드리며 점차적으로 수위를 높여 오다가 이번 보고서 발간에까지 이르게 됐다.

이번 보고서 발간은 아직은 경고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타이완과의 공식 수교로 나아갈 수도 있다는 협박용이라는 해석이다. 향후 중국이 무역분쟁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이 문제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달라질 가능성이 없지 않다.

미국-타이완 수교가 정말로 실현되면 중국이 단교를 검토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미국도 향후의 행보를 최대한 잘게 세분해서 대응 카드를 단계적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층 더 치열해질 미중 양국의 수 싸움을 세계 각국이 지켜보게 되리라 전망할 수 있다.

이 문제는 한국 기업들과 정부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중국과의 무역분쟁이 자국 뜻대로 전개되지 않을 경우, '하나의 중국' 원칙을 좀 더 많이 파괴하는 쪽으로 미국이 나아갈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압박 효과를 높일 목적으로, 미국이 동맹국 기업과 정부를 '하나의 중국' 원칙을 깨는 방향으로 유도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일례로, 한·미·일 삼각동맹에 타이완을 끌어들여 한중관계를 난처하게 만들 수도 있다.

얼마 전 맥도날드가 대만 국적이 표기된 수험표를 광고 영상에 내보냈다가 곤욕을 치른 것처럼, 한국 기업과 정부도 미국의 '하나의 중국 원칙 깨트리기'에 휘말려 사드 사태 때와 같은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하나의 중국' 원칙이 미중 간에 어떻게 전개될지는 물론, 이 문제가 한국에 어떤 영향을 줄지에 대해서도 예의주시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오마이뉴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