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거리에 담긴 지역문화]국내 最古 인공숲 상림…현대사 아픔 간직한 곳도

함양 떠난 이들이 고향을 그리워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상림공원이다. "함양 사람이면 다들 한 번쯤은 찾아봤을까"라는 의문은 금세 부질없음으로 되돌아온다.

1.6㎞ 둑을 따라 120종·2만여 그루 활엽수가 심겨 있는 상림공원은 해방 직후에는 1947년 1만여 명이 모인 '7·27 인민대회' 등 크고 작은 집회 장소로 활용됐다. 군중이 모일 공간으로 이만한 곳이 없었고, 함양읍에 있어 접근성도 더없이 좋았다.

이후 1950년대까지는 자유롭게 취사도 하고, 도토리도 줍는 놀이터 같은 곳이었다. 1962년 천연기념물 제154호로 지정된 이후에는 강제해서도 아닌데 스스로 아끼는 마음으로 대한다.

1962년 천연기념물 제154호로 지정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숲인 상림공원. /박민국 기자

소풍 장소이자, 만남의 장소이자, 데이트 장소, 그런 곳이 상림이다.

함양 사람들이 상림을 아끼는 이유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숲이라는 상징성 때문만은 아니다. 상림에는 백성을 사랑하는 선비 마음이 깃들어 있다. 더불어 '효 정신'은 또 다른 기운으로 다가온다.

함양은 고산 협곡이라 적은 비에도 마을 중앙을 흐르는 위천이 자주 범람해 백성 시름을 키웠다. 당시 함양군수로 있던 최치원 선생은 둑을 쌓고, 물길을 돌리고, 활엽수를 옮겨 심어 인공 숲을 조성했다. 물길 없는 곳에 심은 나무가 말라죽자, 하천물을 숲 쪽으로 돌려 흘려보냈다고도 한다. 이곳 사람들은 "토목공학 측면에서도 실험적 발상이 빛나는 곳"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숲·냇물이 있는 곳에는 뱀·개구리·개미 같은 것들이 들끓기 마련이지만, 이곳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여기에는 최치원 선생 효심에 하늘이 감동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전해진다. 최치원 선생은 어머니가 상림에 갔다가 뱀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를 듣고 당장 상림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뱀·개구리·개미 같은 해충이 두 번 다시 이곳으로 들지 마라'는 주문을 외우자 이후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애초 상림은 총 길이 6㎞에 이르는 대관림의 일부분이었다. 도시화·경작지 확대로 중간 부분이 끊겨 상·하림으로 나뉘었고, 이후 하림에는 군부대가 들어서 완전히 소멸되었다. 지금은 하림 복원사업이 진행돼 숲이 울창해질 날을 기다리고 있다.

상림에서 함양군청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학사루가 나온다. 최치원 선생이 함양군수로 있으면서 즐겨 찾아 시를 지었던 곳이다. 이곳이 역사적으로 큰 사건의 시발점이 됐다는 점은 흥미롭다. 김종직(1431~1492)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 선비 아닌 무인 출신 유자광(1439~1512)의 시가 학사루에 걸려있는 것을 보고 "소인배 글을 당장 없애라"고 명해 철거한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은 1498년 연산군 때 있었던 무오사화 시발점이 됐다.

함양읍을 벗어나 지곡면 쪽으로 가면 일두 정여창 고택이 나온다. 이와 관련해 함양 역사 발굴·복원에 일생을 바친 김성진(77) 함양문화원장은 한 가지 얘기를 들려주었다. "이수성 전 국무총리가 고택을 둘러보고서는 '이런 큰 집을 지었으면 정여창 그 양반이 얼마나 백성 피를 빨아먹었겠나'라고 하길래 내가 '고택은 정여창 선생 타계 100년 후 후손들이 지은 것이다. 정여창 선생은 학문밖에 모르던 사람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일두 정여창 고택은 9917㎡(3000평) 터에 모두 12동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사람이 살지는 않고, 인근에 있는 하동 정씨 후손들이 매일 찾아 관리하고 있다.

지곡면 개평리에 위치한 일두 정여창 고택.

이러한 선비 문화가 함양 곳곳을 휘감고 있지만, 빨치산 흔적도 조각조각을 이룬다.

이곳의 산새 험한 폐쇄된 지형은 근·현대사 아픔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병곡면 도천마을(우루목)에는 빨치산 대장 하준수(1921~1955) 생가가 폐허로 방치돼 있다. 생가 입구에는 개 한 마리가 외로이 지키고 있다. 본채에는 하홍수라는 명패가 붙어있는데, 이웃 주민 임종두(72) 할아버지는 이렇게 전한다. "친척 동생 하홍수가 이 집을 샀다가 지금은 안 살고 딴 데로 떠난 지 오래됐다."

방안에는 1995년 날짜가 찍힌 신문이 벽에 덕지덕지 붙어있다. 우물 안 고여있는 썩은 물이 생가의 현 모습을 대변해 준다.

마천면 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신라말 창건된 벽송사가 나온다. 산속 깊숙이 있어 한때 빨치산 야전병원으로 사용되다 국군에 의해 소실되기도 했다. 불탄 벽송사 건물 아래에 새로 지은 것이 현재 모습을 이루고 있다.

서상면에 있는 육십령은 6·25 때 북한군이 우익인사 300여 명을 학살한 또 다른 아픈 역사를 소리 없이 간직하고 있다.

또 다른 눈으로 함양을 바라보면 경계의 문화가 보인다. 지리적으로 전라도와 경계해 있기도 하지만, 과거 백제·신라 사이에 끼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이태식(51) 함양군 문화관광과장은 이렇게 말한다. "함양 곳곳에 있는 불상을 보면 섞여 있는 문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는 선의 아름다움이 있고, 백제는 투박하면서도 미소를 머금은 표정이 담겨있다. 상림 불상을 보면 이 두 가지 모습이 혼재해 있다. 함양은 그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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