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조선소 절망과 희망 갈림길에 서다] (1) 조선소 흥망성쇠와 노동자
중형 조선사로 시대를 풍미했던 통영시 미륵도 조선 3사가 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이중 삼호조선이 지난 2월 파산·해체됐다. 신아sb와 21세기조선은 2008년 이후 단 1척의 선박 수주도 없이 올 중반 이후 공장 가동이 전면 중단될 위기다. 이 상황이 지속한다면 나머지 조선소도 파산할 가능성이 크다. 통영 조선업은 세계적 호황과 불황을 반복해 왔다. 세계 10위권 선박 수주를 기록하기도 했다. 선박 매출이 통영시 총생산액의 40% 이상을 차지하기도 했지만 2012년 현재 통영 조선소들은 몰락하거나 몰락 중이다. 흥망 갈림길에 선 통영 조선소 노동자의 삶을 통해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중소 조선업을 진단해 본다.
"헉, 헉, 헉…."
전화기 속으로 한 노동자의 거친 호흡소리가 들렸다. 통영의 조선소 문제를 알리기 위한 신아sb 6명의 노동자가 통영-부산-울산-대전-서울을 향해 걷고 있다.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고 했다.
이들이 길을 떠난 5월 11일, 신아sb는 유럽 선사와 6척 수주 의향서를 체결했다. 하지만, 채권단이 원가 이하로 선박을 수주할 때 RG(은행 보증) 발급을 하지 않아 수주를 해도 선박 건조를 할 수 없는 상태, 이들 6명은 정부가 대주주인 은행에 RG 발급을 요구하며 이명박 정권을 향해 걷고 있다. 통영에 남은 노동자들은 조선소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에 들어갔다.
통영 미륵도 조선 3사 중, 삼호조선은 지난 2월 파산했다. 눈물을 흘리던 삼호조선 젊은 노동자의 눈물, 그들 수천 명은 지금 어디로 갔나.
해방 다음해 1946년, 신아sb의 모체 '최기호 조선소'가 설립되면서 1966년 통영 근대 조선의 역사는 시작됐다. 멸치선 등 목선을 제조했던 이 회사는 60년이 지나 매출 3000억 원이라는 수주 잔량 세계 16위 조선소로 성장했고 지금은 쓰러져 간다.
박정희 시절, 1차 석유 파동이 시작된 1973년 조선 불황으로 최기호 조선은 정부가 내건 산업 합리화 정책으로 통폐합 대상이 되지만 살아남았다. 정부는 최기호 조선에 1억 원을 지원하고 4만 6150평의 공장 부지를 승인했다. 이 회사는 1974년 신아조선으로, 정·관계 전방위 로비로 악명을 떨친 이국철 회장의 SLS조선을 거쳐 2011년 신아sb로 사명을 변경했다.
2차 석유 파동이 시작된 1978년, 신아sb 가공조립 2팀 박영식(53) 직장은 당시 19세,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취직됐다. 34년을 이곳에서 근무한 몇 안 되는 최장기 기능직 근속자다. 시간당 1750원, 12만 원 월급을 받은 입사 첫해, 신아조선은 주식 전량이 매각되며 대우그룹 위장 계열사가 됐다.
조선업은 호황과 불황을 거듭했다. 1980년대 중반, 중견 조선소인 남광조선 등 9개 업체가 이때 도산했다. 하지만, 1987년 이후 엔화 강세와 국제 참치 시장 호황으로 조선 경기는 다시 회복된다. 박영식 직장은 당시 250t짜리 화물선과 참치선, 8000t짜리 시멘트 운반선 등을 만들었다.
1986년 중매로 결혼한 박영식 직장은 1988년 올림픽이 있던 해에 두 번째 딸을 얻었다. 가정을 꾸린 그는, 길어지는 잔업으로 "하숙생같이 살았다"고 했다.
1980년대 말, 대기업 적자 규모가 커지자 정부는 부실기업 정리를 본격화했다. 대우그룹 5개 계열사가 매물로 나오지만 정작 신아조선을 인수할 기업은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신아조선 종업원은 600명 정도, 부지는 시가 300여억 원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신아조선은 1990년 220억 원의 매출을 올렸지만 원양어업 부진 등으로 매입 기업이 없어 대우그룹의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이때 통영인은 단결했다. 신아조선 노동자와 임직원, 통영 유지들이 적게는 200만 원, 많게는 1000만 원씩 갹출해 신아조선을 인수하며 새 역사를 쓴다. 박영식 직장은 대우계열 신아조선을 퇴직하고 이때 받은 위로금과 퇴직금을 새 법인 신아조선에 투자, 주식 600주를 배당받게 된다.
새 법인은 건물과 토지만 인수한 상태, 자동차 운반선을 수주하지만 장비가 없었고 건조 능력이 되질 않았다. 박영식 직장과 노동자들은 삽을 들고 직접 손으로 퍼 독(dock)을 만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해냈다. 대형 크레인은 부품만 구입, 직접 조립 제작까지 했다.
"이때가 지금보다 육체적으로 더 힘든 시기였다. 우리가 회사 주인이었다. 스스로 빗자루를 들고 나왔고 자발적으로 일했다."
종업원 지주회사는 사장부터 여사원까지 주식 비율에 따라 같은 성과급을 받는 등 진보적 기업 경영을 했고, 1993년 5000만 불 수출탑까지 수상했다. 이 시기, 신아는 재일교포로부터 3000t급 6척을 주문받고 납품하면서 일약 세계적 조선소로 알려지게 된다. 1994년, 통영 삼호조선이 설립되고, 98년 21세기조선이 법인 설립을 완료, 이때부터 통영 미륵도 조선 3사 시대가 시작됐다. 박 직장은 이 시기를 거치며 40대 초반, 반장에 이어 입사 20년 정도에 기능직 최고직인 '직장'으로 진급, 조선 인생 절정을 맞았다. IMF 외환위기를 거치지만 수주 잔량이 많았던 신아조선은 거뜬히 이 상황을 견뎌낸다. 2000년 중반까지 5만 t 건조 능력을 갖추며 신아조선은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견제 세력 없던 종업원 지주회사는 결국 부패했다고 알려졌고 종업원 지주회사는 뒤뚱거렸다.
"종업원 지주회사를 까발려 봐야 한다는 그런 소리가 많이 들렸다." 박 직장의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2006년 이국철 회장이 이끄는 매출 300억 원의 SLS가 3000억 원 매출의 신아조선을 인수하며 일대 변화를 겪게 된다.
SLS 인수로 종업원 지주회사는 해체됐다. 박영식 직장이 보유한 주식 600주는 주당 1만 4000원으로 계산돼 840만 원, 돈을 받은 그는 더는 회사의 주인이 아니었다. 인수합병 전문 기업으로 알려진 SLS를 노동자들은 믿지 못하고 있었다. 15년 전 해산한 노동조합을 노동자들은 다시 결성했다.
2008년 유럽발 국제 금융위기가 오고 SLS조선은 2009년 6억 불 수출탑을 수상하지만 결국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
국제금융 위기가 맹위를 떨치던 시기, 이국철 회장은 1년 30척을 건조하겠다며 시설을 확충하고 300명쯤이던 본사 직원을 1000명까지 늘렸다. 문어발식으로 9~10개 계열사를 만들어갔다. 현 부지 내에서는 최대 13척밖에 건조하지 못한다는 것을 박영식 직장은 30년 경험을 통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자꾸만 뭔가가 꼬여간다고 생각했다.
"SLS 이국철은 신아조선을 팔아넘기려 했다. 인원과 사업장을 늘려 규모를 키우고 흑자 3년을 통해 요건을 갖춰, 주식 상장 하는 게 목적이었다. 먹고 튀는 수법이다."
조선소 한 관계자의 말이다.
이국철 회장은 허위 공시, 조선소 확장과 기업신용등급을 높이기 위해 뇌물을 건넨 혐의로 2009년 기소됐다. 결국, SLS 그룹은 해체되고 신아는 조선 불황 등 문제가 복합적으로 엉켜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2008년 이후 신아sb는 4년간 단 1척의 선박도 수주하지 못했다. 현재 건조 중인 11척의 척당 가격은 6400만 달러에서 3200만 달러로 절반이나 떨어진 상태다. 이 11척은 주문받고 제작 과정에서 계약 취소된 선박이다. 현재 신아sb 작업장은 몇몇 공정 외에 대부분 작업이 중단돼 있다.
박영식 직장은 회사의 흥쇠를 기능인의 눈으로 묵묵히, 아프게 지켜봐 왔다. 동료 2명이 현장 철판에 깔려 숨지고 가스 질식으로 숨지는 것을 눈앞에서 봤다. 평생 조선소 현장에서 일한 죄, 그는 종업원 지주회사가 망하던 그때처럼 지금도 아파했다. 세 딸을 키웠고 집을 샀고 노년을 준비하고 싶은 쇳덩이 같은 50대 조선 노동자는 한숨 쉬었다.
"……계속 일하고 싶다."
국토대장정을 떠난 신아sb 노조원 6명 중 1명인 제진성 씨는 18일 현재 일주일째 동료와 함께 걷고 있다. 그는 17일 왼쪽 엄지발톱이 빠졌다. 오는 31일 이들은 서울에 도착해 '망해가지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정부가 나서면 가능하다. 우리는 수주 의향서를 체결했다. RG를 발급하라'고 절규할 예정이다.
"일하고 싶다"고.
▶25일 자에 계속
관련기사
잠깐! 7초만 투자해주세요.
경남도민일보가 뉴스레터 '보이소'를 발행합니다. 매일 아침 7시 30분 찾아뵙습니다.
이름과 이메일만 입력해주세요. 중요한 뉴스를 엄선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