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조선소, 절망과 희망 갈림길에 서다] (2)통영 조선소 노동자의 삶

달달달……. 오금이 저리고, 사타구니가 쪼그라들었다. 고소공포로 '딱 죽겠다'라는 생각, 밑도 끝도 없이 딸아이 우는 얼굴이 떠올랐다.

철판 절단 일을 하던 그가 갑자기 '크레인 신호수' 일을 시작한 첫날, 상황이 그랬다. 쇠로 만든 운송용 들것, 이게 15층 높이 크레인 줄에 매달려 건조 중인 배 위로 붕- 떠올랐다. 그는 이 쇠들것에 올라타고 있었다. 현기증에 정신이 아질아질 했다.

그의 사회적 이름은 조선소 노동자. 병역특례로 2001년 종업원지주회사였던 신아조선에 입사했다. 설계도에 따라 철판을 자르는 일, 많은 철판을 녹였고 잘랐다. 불똥에 팬티까지 구멍이 뚫리는, 성한 옷이 없는 날들이었다.

34세, 그의 눈매는 매섭고 목소리는 컸다. 투박하게 말했고 컬컬하게 웃었다.

신아sb 노동자 이충호 조장이 무전을 통해 크레인으로 모래가마를 옮기고 있다. /허동정 기자

이 일만 7년, 절단 일에 잔뼈가 굵고 뜨겁게 일을 할 때 이국철 회장은 이 절단 공정을 외주 업체에 넘겨버렸다. 졸지에 그는 하던 일을 잃었다. 두 달 정도를 일없이 지냈고 해고의 두려움이 그를 움츠리게 할 때 그는 갑자기 크레인 신호수가 됐다.

그의 일터는 건조 중인 화학제품운반선 2척의 한가운데 독(dock)의 맨 끝에 있었다. 대형 크레인 바로 아래, 1평이 안 되는 컨테이너 안 대기실에서 쉬곤 했다. 돌아앉으면 통영 바다가 눈앞에 있었다.

이국철 회장은 취임 후 2년 만에 조선소 중요업무인 절단과 배관, 의장(배 부속품) 등을 계열사로 넘겼다. 한 노동자는 "국철이가 다 빼갔다"고 했다. "돈 되는 일은 모두 계열사가 독점했다"고도 했다. 조선소는 이름뿐, 독(dock)에서 조립하는 공정만 남을 정도였다.

딸, 딸, 딸……. 딸 셋의 아버지, 부모님을 모신 그의 월급은 뗄 것 떼고 190만 원 안팎이다. 보너스 140만 원 정도가 있다. 그나마 일이 없는 동료는 월급 150만 원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만든 배가 진수될 때까지, 일부 공정이 멈춘 조선소지만 그는 선박 건조가 끝날 때까지 일을 할 수 있는 몇 명 중 한 명의 노동자다.

몸 하나로 조선소에서 돈을 벌어 딸과 아내, 식구를 위한 양식을 구했다.

입사했던 종업원지주회사가 부패로 망가졌고 이국철 회장이 이를 인수하고 전국이 이 회장으로 들썩일 때도 그는 일만 했던 노동자였다. 현장에서 11년, 그는 일감이 늘거나 줄고, 사람이 늘거나 줄어드는 것을 알 뿐, 100척 이상을 진수해 떠나보내면서 독이 빌 때마다 허전함을 느끼는 조선소 노동자였다.

3년 전, 동료와 술을 마시고 시원하게 긁었던 카드 덕에 신용카드를 압수당한 공처가였고 월 20만 원 용돈을 받아 2500원짜리 담배를 하루 한 갑 반을 피우면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직장인이기도 했다. 용돈 쪼개 경조사에 참여하고, 가끔 "아빠 회사"라며 회사 정문 앞에 진을 친 딸 셋과 아내에게, 유독 짜장면을 자주 먹어 외식이면 짜장면 먹는 것으로 아는 가족에게 행복을 느끼는, 그게 노동자인 그의 삶이었다.

이국철 회장 사건과 유럽발 금융위기 이후 수주가 안 돼 월급이 밀리기 시작할 때 그는 딸들 얼굴이 떠올라 처음으로 조선소 외 다른 직장을 생각했다. 동료는 자꾸 떠나갔지만 그는 결국 머묾을 택했다.

회사가 어려워지자 일단 그는 2000만 원을 대출받았다. 회사가 어려워지면 대출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무작정 돈부터 빌려놓고 보자는 생각,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통영 조선소 신아sb 노동자 이충호 씨

회사가 망할 수 있다는 것, 행여 회생할 수도 있다는 것, 일만 하던 노동자에서, 지금 그는 이 상황을 굉장히 두렵게 느끼는, 전혀 다른 노동자의 신분이 된 듯했다.

점점 희망을 잃어갈 때 신아sb는 지난 11일 유럽선사로부터 선박 6척 수주 의향서를 체결했다. 같은 날, 동료 6명이 채권단에 선수금환급보증(RG)발급을 요구하며 통영-부산-청와대로 향하는 국토대장정 출발 당시, 그는 간절히 그들을 응원한 노동자였다. RG 발급으로 회사가 회생하길 바라는 마음은 서울을 향하는 동료와 함께 역시 간절히 일치해 있었다.

출근한 그는 먼저 귀마개를 하고 안전모를 썼다.

"먹여 살리려…."

무전기를 챙기며 그가 말했다. 크레인 줄이 하늘 위에서 천천히 내려오고 크레인 조종사와 그는 쉴 새 없이 무전했다. 선박 외벽을 다듬을 고압 분사용 모래 수십 개가 크레인 아래에 놓여 있었다. 그는 건조 중인 갑판 위로 올라갔다. 한 가마에 1t , 이 가마를 크레인에 달고 배 위로 옮기는 작업, 이것이 그의 노동이었다. 갑판엔 웅웅- 이는 작업용 소음이 두통을 일게 했다. 15층 높이의 크레인에 달린 모래가마니가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질 듯 달려 있었다. 그의 일은 조선소에서 가장 위험한 일에 속했다. 그의 머리 위에는 1년 내내 이런 물품이 크레인에 위태위태하게 달려 내려왔다. 가마니는 떨어질 듯했고 그는 크레인 연결고리를 풀고 또 풀었다.

오전과 오후, 그는 배와 배 사이를 쇠들것을 타고 옮겨다녔다. 쇠들것에 오를 때마다 그는 "딸들 얼굴이 떠오른다"고 했다.

"아이들을 굶길 순 없지 않습니까"란 말은 그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다.

5월 햇빛은 건조 중인 갑판을 데웠고 그의 몸은 줄줄 땀이 흘렀다.

그는 가윤·민소·가빈의 아버지다. 일하는 도중 딸 아이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그가 고개를 돌려 어리둥절했다. 이름은 이충호, 직급은 조장. 그의 또 다른 이름은 통영 조선소 신아sb 노동자다. 사흘을 본 그의 인상은 몹시 '단단했다'이다. 그런 그의 눈에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 일이다.

▶6월 1일 자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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