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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에 동백 보거든 제주를 떠올려줘요

4월 제주는 가는 곳마다 봄꽃이 탐스럽게 피었습니다
꽃 핀 자리, 발 닿는 곳 모두 총칼에 움푹 파인 상처였음을

최환석 기자 che@idomin.com 2019년 04월 05일 금요일

잘 지내시죠? 어느덧 4월입니다.

소리 내 봄을 말했던 적이 언제였는지. 오랜만에 불러본 봄은, 입말의 여운이 참으로 깁니다. 살가운 진동이 입안을 간질이는 게 계절과 꼭 어울립니다.

남쪽은 벚꽃이 한창 성합니다. 벌써 바람에 날리어 땅에 떨어진 것도 적잖습니다. 저는 남쪽에서도, 육지와 한참은 떨어진 제주에 닿아 흐드러진 봄꽃과 함께입니다.

당신과 이 섬에서 쪽빛 바다를 감상했던 때가 빛처럼 훤합니다. 그때는 몰랐던 제주의 4월을 이참에 조금 깨쳐 당신께 전하고파 이 글을 씁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3일에 글을 써 보내니, 5일이면 닿겠습니다. 늦었지만 찬찬히 읽어주세요.

▲ 서귀포시 무등이왓이 고향인 홍춘호 씨가 11세 때 겪었던 4·3 사건 참상을 설명하고 있다. 4·3 사건 여파로 무등이왓에는 현재 사람이 살지 않는다. /이현희 기자 hee@idomin.com

◇제주공항 = 제주공항에 비행기가 안착하고 우리는 동시에 이 섬에 발을 내디뎠죠. 바람이 무척 불어 꽤 혼났던 기억입니다. 거센 바람과 제주의 풍광에 넋을 잃었던 우리는 그땐 4·3이 무언지 몰랐습니다. 이미 4·3의 그림자를 밟고 있는지도 몰랐었죠.

제주에 들른 육지 것은 자의든 타의든 '제주 4·3 사건'의 시뻘건 테두리에 깊숙이 들게 됩니다. 제주공항 활주로 아래에는 제주사람의 한이 깊게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4·3 특별법이란 것이 생겨 땅에 묻힌 희생자의 유해가 다시 빛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시기 396구의 유해가 발굴되었는데, 제주공항 남북활주로에서도 엄숙한 작업이 있었습니다. 60여 년 만의 일입니다.

여전히 활주로에는 유해가 묻혀있으리라 판단되나, 비행기가 한시도 쉬지 않고 들었다 나가기를 반복하기에 작업을 이어가는 것이 아무래도 힘든 모양입니다.

◇제주 4·3 평화공원 = 공항에서 차로 10여 분 내달려 제주시 봉개동 명도암마을을 관통하면 제주 4·3 평화공원입니다. 이곳에서 저는 개괄적인 '제주 4·3 사건'을 배웠습니다. 지금껏 4·3이 한 날을 의미한다고 여겼는데, 아주 큰 착각이었습니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소요 사태를 거쳐,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구역 해제가 있기까지 이곳에서 벌어진 무력 충돌과 진압에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아우릅니다.

7년 7개월. 강산이 바뀌기에 조금 모자라나, 제주는 그 시기 무섭게 변했습니다. 희생자만 1만 4233명. 추정치는 2만 5000명에서 3만 명입니다. 제주사람 10명 중 1명이 생죽음을 당했다는데, 그 무시무시한 수치는 가늠조차 어렵습니다. 시뻘건 피가 켜켜이 쌓여 지금의 푸른 섬이 되었다는 것이 참 서글픕니다.

가슴이 순간 답답하여 바깥으로 나갔더니 탁 트인 터에 위령탑이니, 위패봉안실이니, 줄 이은 행불인 표석이 눈에 선합니다.

위령탑 가까이 5개의 수의를 도상화한 것이 있어 가까이 살폈습니다. 어른 남녀, 청소년 남녀, 아기의 수의입니다. 실제 남녀노소 구분없이 희생되었던 그들에게 입히는 수의라는 것을 알고 먹먹해졌습니다.

넓은 터 한편에 달팽이형태 벽이 있고, 그 가운데 눈처럼 하얀 바닥과 젖먹이를 안은 여인 조각이 놓였습니다.

1949년 1월 6일 군인에게 쫓겨 두 살 난 딸을 등에 업고 피신하다 총에 맞아 숨진 변병생 모녀를 조각으로 불러내었답니다. 평화공원 뒤편 오름으로 향하는 길에서 실제 이처럼 발견되었답니다.

'비설'이라는 조각의 이름과, 벽에 새긴 제주 자장가 '웡이자랑' 가사를 조용히 읊조리며 평화공원을 떠나려는데 발이 쉬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 제주 4·3 평화공원 전시실 6관 출구에 4·3 사건 희생자 사진이 빼곡하게 걸려 있다. /이현희 기자 hee@

◇섯알오름 = 차로 50분, 제주의 남쪽으로 향한 저는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섯알오름에 닿았습니다. 알 오름 세 개가 있는데, 서쪽 것이 섯알오름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이 제주사람을 부려 구축한 거대 탄약고는 1950년 한국전쟁을 맞아 다시금 육지 것이 할퀸 상처로 뒤덮였습니다.

예비검속이라는 이름 아래 1950년 8월 20일 섯알오름 등에서 경찰에 총살당하고, 무자비하게 묻힌 이들만 1000여 명입니다.

제주사람이 강제동원돼 닦았던 일제의 탄약고 터는 어처구니없이 그들의 무덤이 되었습니다. 유족은 시신 인도를 거부하던 군과 6년을 씨름하고, 가까스로 넋을 쓸어 모았습니다.

분별없이 뒤섞인 시신 구별은 지난했습니다. 뼈 하나하나 대충 맞춰 132구를 구성해 이장했습니다.

백조일손지지. 서로 다른 조상이 한데 죽어 뼈가 엉기어 하나가 되었으니 후손 모두 한 자손이라는 의미가 가슴을 깊숙하게 후벼 팠습니다.

죄인들은 여전히 말이 없고, 희생자가 되레 화해와 상생을 말하는 4·3의 현실이 떠올랐던 까닭입니다. 오름 곳곳에 핀 산딸기꽃, 살갈퀴, 노란 유채꽃이 어쩜 그렇게 미워 보이던지요.

국방부가 71년 만에 오늘 4·3 희생자에게 애도를 표했습니다마는, 섯알오름에 있으니 "유감"이라는 말이 참으로 가볍게 와 닿습니다. 거센 제주의 바람에도 쉬이 날리지 않을 그런 사과는 어려울까요.

▲ 제주 4·3 평화공원에는 시신을 찾지 못한 4·3 사건 희생자의 표석들이 놓여 있다. /이현희 기자 hee@

◇무등이왓 = 제주에는 이름 없는 마을,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이 많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육지 것은 그 자리에 집이든, 상점이든 무언가 세우길 희망하지만, 제주사람에겐 그러지 못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엔 4·3 당시 무등이왓·조수궤·사장밧·간장리·삼밧구석, 이렇게 다섯 자연마을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1948년 11월 15일 광평리에서 무장대 토벌을 마친 군 토벌대는 동광리를 포위하고 주민들을 무등이왓에 모이게 했습니다. 소개령을 미처 듣지 못했던 주민들에게 토벌대는 총구를 겨누고, 기어코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학살이 시작되어 여기저기로 숨어든 주민들 중 120여 명은 마을 북쪽 도너리오름에 있는 '큰넓궤'라는 굴에 은신했습니다. 입구와 통로는 좁아 기다시피 지나야 했고, 물이 없어 바닥 틈에 고인 물을 빨아먹어야 했던 그곳에서 120여 명이 50일 넘게 살았답니다.

동광리 복구는 1953년에 이뤄졌으나, 4·3 당시 동광리 중심이었던 무등이왓은 끝내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로 남았습니다.

춤을 추는 아이를 닮았다는 지금의 무등이왓에서, 그땐 11세였던 홍춘호 삼촌은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을 토해냈습니다. (육지 것은 촌수를 크게 따지나, 제주사람은 모두 '삼촌'이라 부릅니다. 지금도 남녀를 떠나 살갑게, 나이가 든 어른에게 삼촌이라 부르면 기쁘게 반긴다고 합니다.)

부모의 손을 잡고 총부리에서 멀리 도망쳤던 삼촌은 큰넓궤에서 살았던 시간을 숨 가쁘게 전했습니다. 아주 막힘 없는 이야기는 너무나 생생하여 현실과 동떨어진 꿈 같았습니다.

11살의 삼촌은 별을 보고픈 마음이, 나가면 죽는다는 현실보다 더 컸나 봅니다. 말리지만 않았다면 큰넓궤 밖으로 후다닥 나갔을 듯한, 밤하늘 이야기를 할 때 팔십 노인의 눈빛은 딱 11살 아이의 그것이었습니다.

▲ 제주 4·3 사건을 상징하는 동백 오른쪽으로 1949년 1월 6일 두 살 난 딸과 함께 군인에게 쫓기다 총에 맞아 숨진 변병생 모녀의 이야기를 조각으로 만든 작품 '비설'이 보인다. /이현희 기자 hee@idomin.com

사람이 살았다는 자리에는 짙은 초록색 풀이 무성하고, 무꽃이 섬뜩하리만큼 하얗게 피어있었습니다.

4·3에는 뒷말이 쉽게 붙지 못합니다. 공식적으로는 사건이지만, 참상의 무게를 받칠 그릇으로는 부족한 느낌입니다.

미군정과 서북청년회의 무자비한 횡포에 초점을 맞추면 항쟁이겠으나, 경찰이나 군인도 목숨을 잃었고, 더욱이 군경에 쫓기던 무장대가 저지른 살인도 일부 존재하여 정명(正名)은 여전한 과제입니다.

물론, 이념이라고는 모르는 어린아이들도 죽어나간 4·3을 '빨갱이'라는 틀로 쉽게 규정하려는 이의 주장은 논할 가치가 없습니다.

71년이 지났어도 풀지 못한 숙제가 허다한 4월 제주에서, 제 가슴에 마침 동백이 피었습니다. 실제가 아닌 배지로 만든 동백인데, 4·3을 상징합니다.

툭 하고 동백이 질 때나 4월이 되면, 제가 아니라 4·3을 떠올려주시길. 당신께 바라는 것은 오직 이것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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