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으나 서나 연극 생각, 70년 외길 인생
15세 때 우연히 무대 올라
통영·마산 중심으로 활동
병환 중 연극사 집필 몰두

경남 원로연극인 지운(志雲) 한하균 선생이 16일 별세했다. 향년 87세.

통영에서 태어나 마산에서 주로 활동한 그는 온재(溫齋) 이광래(1908∼1968), 월초(月樵) 정진업(1916~1983), 배덕환(1916∼2010), 화인(花人) 김수돈(1917~1966)에 이어 경남 연극계 마지막 원로였다. 선생의 별세로 경남 연극의 토대를 이루었던 한 세대가 끝난 셈이다.

◇15세 연극을 만나다 = 한하균 선생은 1946년 통영중학교 4학년(6년제) 때 처음 연극을 접한다. 학예회 때 발표할 <조국>(작 유치진, 연출 김춘수)에 조연출로 참여했다. 이후 국어 교사인 김용기 선생이 연출한 <이차돈의 사>에 처음 배우로 출연했다. 이때 우연히 유치진 선생 눈에 들어 연극 재능을 인정받았다.

선생은 1950년 동국대 국문과 예과에 진학했지만, 한국전쟁으로 다시 통영으로 돌아온다. 그러고는 유치진 선생의 도움으로 신극협의회 연구생이 된다. 이로써 본격적인 연극 공부가 시작됐다.

다시 대학 생활을 하던 중 3학년 때 모교인 통영고등학교(옛 6년제 통영중학교) 교사가 돼 다시 통영을 찾는다. 이후 1957년 부산공업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겨 부산 지역 문화예술인과 활발히 교류했다. 1960년 서울로 향한 선생은 한국 아동극 창시자 주평 선생이 만든 아동극단 '새들'과 성인극단 '오월극단'에서 상임연출로 활동했다. <피노키오>, <별주부전>, <숲 속의 공주> 같은 작품을 했는데, 임동진, 안성기, 전영록 같은 배우들이 출연했다.

연극인 고 한하균 선생. /경남도민일보DB

◇마산에 정착하다 = 그가 평생 주 무대였던 마산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1962년부터다. 1961년 마산 연극을 이끌던 월초 정진업과 화인 김수돈이 '3·15의거 1주년 기념 예술제전'을 계기로 그를 불러들였다. 예술제전 후 서울로 돌아간 선생은 1년 뒤 다시 마산 연극계의 부름을 받고 연극 <고래>를 3·15회관(현 마산노인종합복지관 자리) 무대에 올렸다. 당시 마산에서 처음 시도된 표현주의 극이었다. 이어 1963년 마산예술인극장 창립을 주도했다. 이후 마산예술인극장은 한국연극협회 마산지부로 개편됐고 선생은 부지부장을 맡았다. 1968년부터는 지부장을 맡아 12년간 마산 연극을 앞에서 이끌었다.

◇연극사 집필에 몰두하다 = 그러던 중 1978년 중풍(뇌졸중)으로 고생하며 무대 활동이 위축됐다.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한 그는 연극사 정리에 정열을 쏟았다. 통영시청이 발행한 <통영연극사>, 마산시청이 발행한 <마산연극사>를 집필한 그는 2000년부터 경남도민일보에 <오동동 야화 - 내가 만난 연극인들>을 연재했다. 어제를 알아야 내일이 있다는 선생의 지론에 따라, 지역 연극인을 통해 경남 연극사를 재정리하려는 취지였다.

하지만, 2001년 다시 한 번 중풍이 오면서 모든 것을 접고 회복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천생 연극인 고향에서 눈을 감다 = "현대 연극 흐름을 보면 현존 도내 원로 중에서는 가장 고참이셨어요. 경남 연극의 산증인이라고 해야겠죠."

이상용 극단 마산 대표는 선생을 연극에 대한 의지로 두 번이나 중풍을 극복한 오뚝이 같은 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1971년 선생과 인연을 맺은 후 선생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도내 연극인이다. 이 대표는 선생이 통영으로 가면서 기증한 연극 서적들을 가지고 마산연극관을 재정비하기도 했다.

"평생을 연극만 생각하신 분이에요. 그것 때문에 돈도 못 모으셨어요. 일 년에 한두 번 찾아뵈면 여하튼 연극 열심히 하라는 말씀뿐이셨죠."

이 대표의 기억에 선생은 앉으나 서나 누우나 연극만 생각하는 천생 연극인이었다.

2016년 5월 선생은 아들이 사는 통영으로 돌아가 말년을 보냈다. 그리고 16일 그가 태어난 곳이자 처음 연극을 시작한 통영에서 눈을 감았다.

선생의 장례는 경남연극인장으로 치러져 17일 오후 8시 30분 영결식이 통영서울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렸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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