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층은 왜 새로움을 두려워할까…이해와 존중이 변화의 시작일지도

기자가 속한 고씨 집안 3형제에게는 노령의 부모님과 관련한 해묵은 난제가 있다. 어이없는 실수로 은행 빚을 떠안게 된 부모님께 사시는 집을 팔고 규모를 줄여 노후를 편히 보내시라 권하고 있으나 도통 응하지 않는 것이다.

매달 나가는 이자만 3형제가 보조하는 한 달 생활비의 절반 이상이니 '상식'으로 접근하면 답은 자명하다. 두 분이 사시기에 지금 집도 큰 편이고 나름 고가라, 빚도 갚고 목돈도 생기고 무엇보다 자식들과 갈등도 해소하고 '만사형통' 이보다 나은 해법은 없어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강경했던 막내의 마음을 뒤흔드는 일이 생겼다. 미국의 철학자 대니얼 데닛이 저서 <마음의 진화>에서 언급한 다음과 같은 통찰 탓이었다.

"집을 떠나 병원에서 지내게 된 노인들은 육체적으로는 더없이 편한 대우를 받는데도 엄청난 불이익을 당하는 듯한 반응을 보이는 수가 있다. 음식을 먹고 옷을 입고 몸을 씻는 기본적인 활동조차 해내지 못한다. 그런데 막상 집으로 돌아가면 혼자서 그럭저럭 생활을 꾸려나간다.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은 집이라는 환경 안에 너무도 낯익은 표지, 몸에 밴 행동을 유발하는 자극제, 어디에 음식이 있고 전화기가 있는지 등을 일깨워주는 신호를 투여해 온 것이다. 새로운 학습을 하기에는 뇌 기능이 둔화된 그런 노인을 집 밖으로 내모는 것은 마음의 주된 영역에서 그를 단절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낯섦'은 그들에게 '아노미'와 다름없었다. 젊은 사람이야 뇌와 육체 모든 게 팔팔하니 감당하기 어렵지 않지만 노년층은 다를 수 있다. 대니얼 데닛은 그 충격파가 '뇌수술'에 버금갈 것이라고 했다. 돌아보면 부모님의 하소연도 그랬다. 정든 집, 다니는 성당, 만나는 사람들, 근처 식당·마트 등 친숙한 모든 것과 당신들은 작별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어르신은 다를까. 만날 보수정당에 표를 던지고, 변화를 싫어하고, 쓴소리를 불편해하고, 불통과 완고함이 일상이 된 근원에는 당신이 상상치 못한 보다 더 깊숙한 무언가가 있을지 모른다. 정의로 무장한 사람들이 즐겨 꺼내드는 탐욕이나 무지의 소산 따위가 아니라 어쩌면 그들에겐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익숙한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에는, 어떤 정신적·정치적 각성을 하기에는 이미 신경과 세포 용량이 한계치에 다다른. 넘어서면 정신적 내상 수준이 아니라 삶 전체가 통째로 붕괴될 수밖에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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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국에(?) 한낱 가족사를 빌미로 구시렁대고 있는 건, 시간이 갈수록 포기하는 게 늘어나는 개인사와 무관치 않다. 인간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겠다고 꽤 오래 깝죽대왔으나 쌓이는 건 좌절과 체념의 목록뿐이다. 여든 넘은 부모님도 설득하지 못하면서, 내 주변의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하면서 진보를 말하고 정론을 외치는 꼴이라니.

이 글을 다 쓸 때쯤 부모님께 거듭 의사를 물으니 여전히 완강하다. 온 가족이 괴로운데도, 간단하고도 확실한 해법이 손안에 있는데도 당신들은 양보할 생각이 없다. 온 세대가 '살려 달라'는 아우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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