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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정신 자긍심 '함양'…3·1운동 기억은 아쉬워

[경남 항일운동, 현장을 기억하다] (26) 함양·거창

김두천 기자 kdc87@idomin.com 2015년 09월 01일 화요일

'경남 항일독립운동, 현장을 기억하다' 이번 행선지는 함양과 거창이다. 지난 3월부터 이어져 온 이 기획의 종착지이기도 하다.

이들 지역을 마지막으로 찾은 이유는 거창하지 않다. 창원에 살고 운전면허가 없는 함량 미달 뚜벅이 기자가 이들 지역을 둘러보려면 큰 맘을 먹어야 한다.

이곳에 가는 것도 문제지만 이 안에서 흩어진 항일독립운동 현장을 찾아다니는 것은 품이 여간 드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북으로 덕유산, 남으로 지리산, 동으로 가야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함양과 거창은 그 현장도 자가용이 없이 가기 어려운 산지나 오지, 계곡 옆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함양, 의병 선양 모범이나 인물 편차 아쉬워 = 전라북도와 경계에 자리해 있으면서 소백산맥에 접한 산간지대라는 지리적 특성은 이곳 항일독립운동 형태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준엄한 산세를 근거로 한 이 지역 한말 항일의병은 아래쪽에 이웃한 산청과 함께 도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다. 산청에 박동의, 민용호 선생이 있다면 함양에는 문태수, 노응규, 석상용 선생 등이 있다. 함양 서상면 출신인 문태수(1880~1913) 의병장은 소백산맥을 따라 전라도와 충청도를 넘나들며 활발한 지역적 연대로 일본군과 토벌대를 여러 차례 무력화시켰다. 척사파 계열로 안의면 출신인 노응규(1861~1907) 의병장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 진주성을 점령하고 진주의병을 거병해, 부산 일본인 거류지를 공격하려 김해까지 진출하는 등 맹활약했다.

"산청이 항일독립운동 고장임에도 이를 기리는 데 인색한 반면 함양군은 1년에 33억 원을 독립투사 선양에 쓴다"는 향토사학자 추경화 씨 말대로 함양은 산청과 다르게 이 두 사람을 극진히 모시고 있다. 문태수 의병장 집 터(서상면 상남리 1027·1028번지)에 표지석을 세우고 인근엔 사당을 세워 그를 기리고 있고, 노응규 의병장 집터 서북쪽에 기념관을 지어 선양하고 있다. 문태수 의병장 집터에서 서북쪽으로 약 1㎞ 떨어진 곳에는 그가 면장 밀고로 일본군에 붙잡힌 영각사(상남리 1047번지)가 자리하고 있다. 영각사가 있는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선생의 태지비가 세워져 있어 옛 역사를 기억하는 데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다. 노응규 선생 집 터(안의면 당본리 218·219일대)는 없어져 원형과 조성 과정을 전혀 알 수 없다. 하지만 집 터 추정지 인근 산비탈에 생가를 복원하고 문태수, 노응규 외 이 지역 항일 독립투사들을 선양하는 비석군을 세워 후대 본보기로 삼고 있다.

이들 외에도 석상용(1870~1920), 권석도(1880~1946) 의병장도 함양에서 빼놓을 수 없다. 석상용 선생은 지리산 일대 화전민을 규합해 의진을 구성하고 스스로 의병장이 돼 문태수, 양한규, 고제량 의진과 함께 함양, 산청, 남원 일대에서 활약했다. 일본군은 '비호(飛虎·날쌘 호랑이)장군'이라 부를 정도로 그를 두려워한 기록이 남아 있다.

권석도 선생 생가터.

권석도 선생은 1907년 8월 김동신 의병진에 들어가 고광순 휘하에서 지리산 연곡사, 쌍계사 등지 전투에 참가했다. 그해 10월 고광순 전사 후 12월 박인환 의병진과 합류해 그곳에서 의병들 추대로 의병장이 돼 지리산을 거점으로 하동·함양·구례 등지에서 싸웠다. 일본군에 붙잡혀 하동주재소에 감금됐다 탈출하면서 가슴에 총상을 입기도 했다.

이후에도 군자금 모금 등 활동을 하다 일본에 체포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석상용 선생 집 터(마천면 추성리 313번지)는 현재 없어져 다른 집이 들어서 있다. 권석도 선생 집 터(백전면 양백리 587번지)는 얼마 전 허물어져 현재 새로 길을 내는 공사가 한창이다. 더구나 동네 주민들도 이곳에 항일 의병장이 살았다는 점을 아는 이가 없어 이를 기억하는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

◇함양, 의병 아닌 3·1운동에도 관심 둬야 = 현재 함양군 함양읍 용평리 831번지 일대. 전국적인 3·1운동 여파가 함양 내에서도 가장 먼저 미친 공간이다. 옛 함양장터인 이곳에서는 1919년 3월 28일 오후 3시 수천 명 군중이 모인 가운데 만세 함성이 울렸다. 정순길·윤보현·정순귀·노경식 선생 등이 주도한 이날 항일독립만세 소리에 놀란 일본 헌병은 군중을 해산시키고 주동자를 연행해갔는데 이날 모인 군중은 일본군 헌병분견소까지 몰려가 만세 시위를 벌였다. 만세운동은 다음 장날인 4월 2일에까지 이어졌는데 김한익 선생이 정오 장터 중앙에 놓인 소금가마니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니 이날 모인 군중 3000명이 일제히 호응해 만세 소리가 들불처럼 번졌다. 이때 일본 헌병이 쏜 총탄에 하승현 선생 등이 맞았다.

함양 안의장터.

현재 함양토종약초시장(안의면 이전리 13-4~석천리 243번지 일대) 등이 들어선 안의에서도 일제에 저항한 민중의 만세 함성이 퍼졌다.

공식적으로 안의 항일독립만세운동은 3월 31일 펼쳐진 것으로 나온다. 한데 그 이전인 3월 25일 안의장날에도 수동면 상백리 고재경·정재원 선생 등의 주도로 계획됐으나 일본 군경이 이를 미리 간파해 경계를 강화하자 이 거사는 성사하지 못했다.

3월 31일 운동은 전병창·임재상·정순완·전재식·조제헌 선생 등 지역 유지들과 보산리 급천서당 청년학생 김채호, 금천리 최석룡 선생 등이 주도했다. 이들은 비밀리 함께할 사람들을 규합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어 의거를 준비했다. 당일 오후 1시 전병창·임재상·정순환·전재식·조제헌 선생이 장터 복판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려 했으나 그 순간 일제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오후 2시 최석룡 선생이 태극기를 다시 만들어 군중에게 나눠주며 격렬한 시위가 전개됐다. 군중은 오후 7시까지 장터 일대를 누비며 만세를 외치며 연행된 주도 인물 석방을 요구했다.

일본 군경은 당황하며 거창수비대 지원을 요청했고 이들이 온 뒤에야 해산시킬 수 있었다.

함양장터는 현재 전통시장이라 하기 어려워졌으나 당시 네거리로 쓰인 도로가 확장됐을 뿐 같은 구조를 지녔다. 안의장터도 함양토종약초시장이 들어서긴 했으나 옛 장터 모습처럼 너른 터가 형성돼 있다. 이들 지역 적당한 자리에 작은 표지판이나 비석을 세워 이곳이 3·1항일독립운동 현장임을 알린다면 좋은 역사 탐방 코스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함양 항일 독립지사 사적공원.

◇저항 유림 본산 거창 = 거창 항일독립운동의 중심 세력은 유림이었다. 대표적인 게 가북면 곽종석(1846~1919) 선생을 중심으로 한 파리장서운동이다.

1919년 3·1항일독립만세운동에 유림세력이 제대로 결합하지 못함을 아쉬워한 곽 선생과 그를 따르는 문인, 제자들 노력으로 영·호남 유림 137명 연명으로 파리강화회의장과 각 외국 공관, 전국 각 향교에 뿌려진 장서는 대한독립 요구를 세계만방에 알리는 기폭제가 됐다. 곽 선생은 이 일로 일제에 의해 투옥되나 74세 고령에도 일본 법에 호소하기보다 포로 자격으로 전사(戰士)적 의지로 대응한다. 곽 선생은 징역 2년을 선고받으나 도중 병보석으로 풀려나 그해 8월 숨을 거둔다. 곽 선생 집(가북면 중촌리 다전 2252번지)은 없어지고 현재 터만 남아 있으나 이곳이 선생의 집터임을 알리는 표지석과 표지판이 남아 있어 역사 현장 기억에 도움을 주고 있다.

이에 앞서 거창 가조면과 위천면에서는 장터를 중심으로 항일독립만세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나 독립 의식과 열망을 고취시켰다. 이 밖에도 거창에서는 월성서당(북상면 월성리 양지마을 373-8번지 일대)을 중심으로 한 한말 항일의병 봉기도 있었다.

이들 월성의병은 1906년 문태수 의병진과 합류해 싸우기도 하고 덕유산 의병에게 군수 물자를 전하기도 했다. 무주 고창골과 구천동 전투에서 일본군에 큰 피해를 줬으나 1908년 박화기·박수기·유춘일 선생 등 중추 세력이 전사하면서 세가 꺾였다. 당시 월성서당 일대는 현재 캠핑장으로 변모했으나 이곳에 후대에 세운 정자와 기념비가 있어 옛 항일정신 발자취를 되짚어 보도록 하고 있다.

문태수 선생 생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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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천 기자

    • 김두천 기자
  • 창원시청과 시의회를 담당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