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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교육 맞선 항일투쟁 어느 곳보다 뜨거웠다

[경남 항일독립운동 현장을 기억하다] (23) 밀양지역 청년·학생운동

김두천 기자 kdc87@idomin.com 2015년 08월 11일 화요일

김원봉 캐릭터가 출연한 영화 <암살> 영향인지 항일독립운동 역사 현장을 찾아 밀양을 찾는 이들이 부쩍 많아진 모양새다.

지난달 말 민족문제연구소 답사팀이 밀양을 찾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도 경남교육청 협력으로 도내 교사들과 진행한 '경남지역 독립운동사적지 대장정'에 밀양 의열투쟁 역사 현장을 중점적으로 둘러봤다. 항일독립운동사 특히 의열투쟁 역사에서 밀양이 지닌 중요성이 매우 큰 점을 알 수 있다.

한데 전국적 무장독립운동인 의열투쟁이 유명하다 보니 정작 밀양 내에서 일어난 항일 사회·문화·학생운동 전반에 대한 순례자들의 집중도는 조금 떨어지는 편이라 할 수 있다. 투철한 민족교육 정신 아래 일제의 정치·경제 침탈에 항거한 밀양 주민들 항일의지는 다른 어느 곳보다도 치열했음에도 말이다.

◇항일운동 자양분 된 장소들 = 국권피탈에 분개해 지역 내 항일 움직임을 선도한 이들은 유림을 비롯한 지역 유지들이었다.

이들은 연계소(蓮桂所·밀양시 내이동 699-1 현 설봉돼지국밥)를 중심으로 모여 크고 작은 지역문제를 의논했다. 연계소는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 이후 생원과 진사가 된 선비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일제강점기에 밀양 유지와 청년들이 지역 중대사를 논하던 연계소 터. 지금은 국밥집이 들어서 있다.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한말에서 일제강점기 이르는 동안에는 밀양 유지와 청년들이 지역 중대사를 논하던 곳으로 활용됐다. 대표적인 게 1907년 5월 19일 밀양지역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한 국채보상운동이다. 동화학교를 세워 수많은 항일운동지도자를 배출한 전홍표 선생도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빼앗긴 국권을 되찾을 방법을 고민했다.

밀양청년회관(삼문동 219번지 현 해냄학원)에서 1927년 12월 11일 창립대회를 한 신간회 밀양지회가 이듬해 2월 연계소에 사무실을 두고 활발하게 활동을 했다. 1928년 1월에는 밀양여자청년회, 4월에는 근우회 밀양지회 발기인 대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이후에도 신간회와 근우회 등 각종 단체가 밀양 내 중요한 일을 논의하는 장소로 이곳을 이용했다.

연계소말고도 밀양 사회·문화운동 중심기관 역할을 한 곳으로는 밀양교회(내일동 528번지 현 밀양교회)를 꼽을 수 있다. 밀양 읍내에 있던 이곳은 1908년 고삼종 자택에서 시작해 1912년 바로 옆 지금 자리에 예배당을 신축했다. 연계소가 주로 연로한 유림이나 유생들이 주로 모이는 장소였다면 밀양교회 예배당은 청년들의 신문화 운동 진앙이라 할 만하다.

밀양에는 3·1항일독립만세운동 이전부터 밀양기독교청년회가 조직돼 있었다. 1920년대 신문화 운동 주체는 청년층이었는데 기독교계에서도 기독교청년회가 중심이 됐다. 밀양기독교 청년회는 1921년 2월 10일 오후 8시 밀양교회에서 강연회를 했는데 연사는 밀양출신 의열단원 고인덕이었다. 밀양교회 설립자 고삼종의 아들이기도 한 고인덕은 '안락의 본은 고초에 있다'는 주제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연설을 했고 일본은 이를 빌미로 3월 22일 그를 체포해 3년형을 선고했다. 이른바 '밀양기독교청년회 사건'이었다.

밀양청년운동 중심 축이었던 밀양교회.

이를 보면 밀양교회의 위치가 단순히 종교적인 측면에서 지역사회에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민족학교와 교육의 힘 = 밀양 항일 정신 뿌리라 할 수 있는 민족교육의 힘은 전홍표 선생이 세운 동화학교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밀양에는 한말 개화인사들이 민족교육을 위해 세운 학교가 많았는데 그 맥을 잇는 학교 중 대표적인 게 정진학교와 밀양공립보통학교다.

정진학교(부북면 퇴로리 294-2 옛 간호전문학교)는 항재 이익구 선생이 1890년에 세운 화산의숙의 유지를 계승한 학교였다. 1910년 화산의숙 폐교 이후 그 명맥은 야학으로 유지됐다. 이곳 야학은 1919년 3·1항일독립만세운동 이후 수학, 물리학 등 신지식을 가르치는 학교로 성격을 달리했다.

이익구 선생 가문은 학교 건립 장소와 재원 확보를 놓고 인근 유지들과 협의를 했으나 끝내 뜻을 같이하지 못하고 이 씨 일문에서만 재원을 염출해 부지를 마련하고 건물을 지었다.

1921년 3월 25일 이렇게 설립된 정진학교는 명륜정덕(明倫正德), 이용후생(利用厚生)이던 화산의숙의 창학 강령을 계승하고 국민윤리와 애국정신, 신지식 함양에 교육을 중점을 뒀다. 이를 바탕으로 한글과 우리나라 역사, 지리, 애국가창을 등을 통해 애국애족의식을 드높였으며 산수, 이과, 교련 등 신지식도 가르쳤다.

일본으로서는 이 같은 교육 내용이 달가울 리 없었다. 일본은 이에 그해 7월 교장과 학감을 비롯한 교원 전원을 경찰에 구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은 또한 정진학교 졸업생들이 1932년 동창회를 조직하고 동창회보 발행을 준비하자 관련자들을 대대적으로 붙잡아 조사했다. 이들 졸업생들이 자발적으로 정우회나 수양단 같은 결사를 조직하고 그 기관지를 발행한다는 점을 알고서다. 정진학교는 이렇듯 민족교육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의 강한 탄압을 받았으며 그 결과 1939년 강제폐교되는 시련을 맞았다.

밀양공립보통학교(삼문동 3-5번지 현 밀양초등학교)는 1897년 개화인사 손정현 선생이 설립한 밀양지역 최초 사립 개창학교를 계승한 학교였다. 처음 교사는 밀양면(내일동 583번지 현 밀양상설시장)에 자리했으나 3·1항일독립만세운동에 이곳 학생들이 적극 가담하고 주도했다는 이유로 일본에 의해 현재 밀양초등학교 자리로 강제 이전당했다.

3·1운동 주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밀양 민족교육 요람이자 밀양 신문화 산실로 기능했다. 이곳에서는 1922년 1월 12일과 13일 일본식민교육에 항거한 동맹휴업 투쟁이 펼쳐졌다. 이 학교 4·5학년 학생들 중심으로 일본인 교사 배척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학생들은 일본인 교사 아라키 말을 듣지 않고 연명 퇴교한 후 삼문리 청년운동장에 모여 담임교사배척시위운동을 결의했다.

이후 밀양군청으로 몰려 가 교사 처분을 요구했으나 군 당국이 학교 복귀를 권고하자 4·5학년생 전원이 동맹휴학을 결정했다. 군 당국이 교장 부재를 들어 향후 조치를 약속하고 등교를 권유했으나 학생들은 13일 전체 동맹휴업을 하고 교사 사죄 없이 등교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이는 군 당국이 학부형을 설득해 어느 정도 마무리됐다.

◇대규모 항일학생투쟁 일어난 밀양농잠학교 = 밀양에서 펼쳐진 대규모 학생동맹휴교는 주로 지역 유일 중등교육기관인 밀양농잠학교(내이동 1025 구 밀양대학교)에서 일어났다. 1927년 11월 2학년 급장 이몽돌이 일본인 순사에 모욕을 받았음에도 일본인 교사 두 명이 이를 배척한 일로 이 학교 2학년 30명 전원이 등교를 거부하면서 동맹휴학은 시작됐다. 1학년까지 확대한 동맹휴학은 설상가상으로 교사 스즈키가 3학년 학생을 사주해 맹휴 주동자를 구타하는 사건으로 번졌다. 교장 중재로 사건을 무마됐으나 일본인 선생과 학생 간 갈등은 극에 달해 있었다.

밀양농잠학교가 있던 옛 밀양대학교 터.

이 가운데 1930년 11월 수학여행 문제 등을 계기로 이 학교 1·2·3학년 학생 139명 전원이 동맹휴학이 일어났다. 수학여행 후 피로가 겹친 학생들이 하루 쉬기를 요구하며 조퇴나 결석하자 학교는 실습에 빠졌다는 이유로 1학년 전원에게 3일 근신 처분을 내렸다. 이 조치에 분개해 황용암 지도 아래 11월 3일 전교생 130여 명이 총동맹휴학에 나섰다. 맹휴는 12월 2차까지 이어졌으나 학교는 이에 참가한 129명 퇴학이라는 초강수로 사태를 마무리지었다. 비록 성과 없이 학생 피해로 끝났으나 민족교육 측면에서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룬 사건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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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천 기자

    • 김두천 기자
  • 창원시청과 시의회를 담당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