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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 세월에도 꺼지지 않았던 '붉은 의병의 넋'

[경남 항일독립운동, 현장을 기억하다] (21) 의령지역 항일독립운동

김두천 기자 kdc87@idomin.com 2015년 07월 28일 화요일

의령은 '사람'의 고장이다. 경남 18개 시·군 가운데 사는 사람이 3만 명이 채 안 되는 지역으로 규모가 가장 작다. 이런 의령에서 유명한 인물이 많이 배출된 점은 무엇보다 재미있는 사실이다. 의령이 인구가 가장 적은데도 가장 내세울 만한 것이 사람이라니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의령 하면 특히 호암 이병철(1910~1987), 관정 이종환(1924~ ) 같은 거부(巨富)들이 떠오른다.

한데 이병철, 이종환 등에 견줘 남부럽지 않게 돈을 벌었음에도 정작 사람들 관심에서 멀어진 의령의 또 다른 거부가 있다. 백산 안희제(1885∼1943) 선생. 일제강점기 부산에서 백산무역주식회사를 꾸려 번 돈을 독립자금으로 썼을 뿐 아니라 교육·언론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만주까지 건너가 활동한 대단한 항일독립운동가다.

◇백범·백산·백야 중 으뜸 백산 = 안희제 선생은 어릴 때 한학을 공부하고 서울 민립사학인 양정의숙을 졸업했다. 졸업 후 동래군과 의령에 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에 몰두하며 계몽운동을 펼쳤다. 1909년 윤세복·서상일·남형우 선생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조직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하고 이듬해 한일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만주로 1차 망명한 뒤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백산 안희제 선생 생가. /의령군

안희제 선생은 고향인 의령보다 부산에서 항일독립운동으로 더 잘 알려졌다.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려 1914년 부산에 세운 백산상회(백산무역주식회사 전신) 때문이다.

백산상회는 안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려면 자금 모금이 시급하다고 판단해 고향 전답 2000두락을 판 기금으로 설립했다. 백산상회는 설립 초기 곡물·면포·해산물 등을 파는 소규모 상회였으나 1918년 합자회사로, 이후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대 개편됐다.

안희제 등 백산상회 관계자 대다수는 조선국권회복단 단원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했다. 백산상회는 특히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국내 보급 통로로 기능을 하며 임시정부 경비를 조달했다. 백산상회는 1925년 이후 내분이 생겨 사실상 영업중지 상태에 빠지고 1928년 자신 해산한다. 안 선생은 이 과정 속에서도 장학회인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설립하고, 1925년 <중외일보>를 인수해 운영하며 독립운동 열망을 이어갔다.

1930년대에는 가산을 정리해 만주로 재차 망명해 발해농장과 발해학교를 설립해 애국계몽운동에 전념했다. 대종교 교인이던 안 선생은 1942년 만주 일본 경찰이 대종교를 탄압하려 날조한 임오교변(壬午敎變) 때 체포돼 고문 끝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가 몇 시간 만에 사망했다.

항일독립운동사에서 '백'범 김구 선생과 '백'산 안희제 선생 그리고 '백'야 김좌진 장군을 두고 삼백이라 일컫는다. 안희제 선생 생가는 1995년 복원과 함께 문화재로 지정됐다. 이는 태어난 인물이 아니라 구조의 독특함 때문인데 다른 한옥 여느 안채와 달리 방들이 여럿 포개지듯 들어 있고, 다락도 따로 있다. 이는 독립운동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짐작이 들게 한다.

◇의령읍에만 3000 군중 모여 "독립 만세" = 경남에서 항일 의지를 이야기할 때 의령을 빼놓으면 안 된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을 중심으로 한 의병 활동에 그 이유가 있다. '홍의 장군'으로 대변되는 붉은 항일 정신은 1919년 3월 의령지역 항일독립만세운동으로 이어진다. 의령에서는 의령읍과 신반, 봉곡, 덕교장터 일대에서 만세 시위가 펼쳐졌다.

의령군청에서 의병탑 방향으로 뻗은 '충익로'. 이 길에는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 스러져가는 나라를 위해 분연히 일어난 의령지역민들 충심(忠心)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지금은 의령전통시장이 들어선 옛 의령장터 자리는 의령군민 3000여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옛 항일 의병의 혼을 다시금 불러세운 역사적 공간이다.

1919년 3월 군중 3000명이 모여 대규모 만세 세위를 벌인 '충익로' 인근. 현재 의령군청이 자리한 이곳에는 지난 역사를 알려주는 표지판 하나 없다.

의령읍 동동(東洞)에 살던 구여순(九汝淳) 선생은 서울 3·1운동에 참여한 뒤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구 선생은 친구 정용식·최정학·이우식·김봉연 선생 등과 만나 의거를 논의했다. 이들은 3월 14일 의령 장날을 의거일로 정하고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었다. 구여순과 최정학 선생은 강제형 용덕면장을 찾아가 의거 계획을 설명하고 독립선언서 인쇄에 면사무소 직원들 협력을 요청했다. 강 면장은 흔쾌히 승낙했다. 이들은 의령공립보통학교 학생들에게도 의거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의령 항일운동의 진원지였던 의령장터 앞 거리.

의거일인 14일 만세 시위가 시작되자 의령공립보통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군중 300명이 호응했다. 이어 만세운동은 장날에 모인 3000여 명 군중에게로 들불처럼 번졌다.

만세 시위는 이튿날인 15일에도 계속됐다. 비밀 연락을 받은 군중 1000여 명이 의령향교 앞에 모였다. 이날 의령군청 직원인 안의인·정봉균 선생은 의거가 일어나자 시위대열 선두에 서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날 시위가 끝난 후 일본 군경은 중심인물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듣고 오후 4시 군중 700여 명이 경찰서로 몰려가 애국자 석방을 요구했다.

이때 마산 일본군 포병대대가 급파돼 경찰과 함께 총검으로 무력 진압하고 10명을 또 검거했다. 이때 검거 인원만 100여 명. 이 중 30명이 형을 선고받아 진주·대구·서울 등에서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군중 3000명이 모여 대규모 만세 시위를 벌인 곳임에도 '충익로' 어디에도 항일독립만세운동을 기억할 만한 장치가 없는데 아쉬움이 있다. 더구나 현재 군청과 경찰서, 의령향교 자리는 당시 그곳에 그대로 있다. 역사 교육현장으로 사용하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제대로 활용되지 못해 더욱 아쉬움이 크다.

◇의령 곳곳 서린 독립 만세 의지 = 의령읍 만세 주도 인물 중 한 사람인 최정학 선생은 이후 부림면 면사무소 소재지인 신반리에서 3·1운동을 일으키려 정주성(鄭周成) 선생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다. 이들은 15일 낮 12시 의령읍 제2차 의거에 함께하기 전 지금은 신반상설시장이 들어선 신반장터에 집합했다. 이때 주요 인물들은 장꾼 차림으로 군중 속에 들어가 면민들에게 재빨리 태극기를 나눠주고 "대한독립 만세"를 크게 외쳤다. 군중도 이에 합세해 만세를 외쳤다. 이때도 역시 일본 경찰은 총검으로 무력 해산 작전을 벌였고 중심인물이 대거 검거됐다.

부림면 신반에 이어 지정면 봉곡에서도 의령읍 의거에 참여했던 정호권(鄭澔權) 선생 주도로 만세 시위가 펼쳐졌다. 정 선생과 그 동지들은 3월 16일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비밀리에 대중을 규합하는 한편 밤을 새워 태극기를 만들었다. 의거일인 16일 오후 1시 이들은 군중 300여 명에게 태극기를 나눠 준 후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를 저지하려 의령경찰서 중교경찰관 주재소 경찰보 권종수가 달려왔는데 군중은 그에게 뭇매를 가했다. 당시 경찰서가 있던 자리에는 여전히 지정파출소가 서 있다. 장이 서던 곳은 현재 농협과 농협창고 건물이 들어섰다. 이후 상정면(현 화정면) 덕교장터에서도 3월 20일 조균구 선생 주도로 이곳 주민 30여 명이 만세 시위를 전개했다. 시위 군중은 면장 강재언을 끌어내 앞세우고 약 2시간에 걸쳐 면사무소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짖었다. 비록 의령읍이나 봉곡장터 등보다 규모는 작았으나 덕교장터가 있던 자리에는 3·1기념공원을 조성해 이곳이 선열들의 항일 정신이 깃든 곳임을 알 수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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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천 기자

    • 김두천 기자
  • 창원시청과 시의회를 담당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