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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침탈 긴 세월 내내 항일운동 기지 된 다솔사

[경남 항일독립운동 현장을 가다](17) 사천지역 항일독립운동

김두천 기자 kdc87@idomin.com 2015년 06월 30일 화요일

부산과 여수, 목포항을 잇는 바닷길 중간 지점에 자리한 사천은 1906년 삼천포항이 개항한 이후 선진항, 증선포, 진교항 등 사천만 일대 항구가 잇따라 개항하면서 당시 도청이 있던 진주와 서부경남 내륙으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했다. 일제강점기 바다와 맞닿은 삼천포를 중심으로 일본인 진출이 활발했고, 자원 수출과 수입을 위한 갯벌과 해안 매축이 이뤄지면서 근대도시로 성장했다. 해안과 내륙을 잇는 교통 중심이었던 만큼 일본의 침탈도 빠르게 진행됐다. 이에 맞선 항일구국운동도 치열하게 전개됐다.

◇만당 근거지 다솔사 = 안타깝게도 사천지역 항일독립운동 현장은 대부분 없어져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항일독립만세운동을 실행한 장터, 만세운동을 모의하고 동맹휴학으로 일제에 항거한 학교들 모두 새 건물이 들어서거나 이전해 그 시절 그 모습을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여전히 옛날 그 자리 그 모습을 지킨 곳이 있다. 경남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인 다솔사(多率寺)다. 많을 다(多)에 거느릴 솔(率). '많은 군사를 거느린다'는 의미처럼 절 진입로부터 주차를 위해 마련된 너른 터까지 소나무와 편백나무가 절을 호위하듯 빼곡히 서 있다. '불심이 신실한 많은 인재를 거느린다'는 해석도 있는데 실제 이 절과 절이 자리한 봉명산 일대에는 많은 인재가 나고 거쳐 갔다. 특히 불의에 맞서 일본에 항거한 승려와 지식인이 이곳을 본거지 삼아 항일 활동을 펼쳤다.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다솔사를 승병기지 삼아 의병 활동을 한 것이 유명하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1917년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한 장소인 다솔사 요사채 안심료(安心寮).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만해 한용운 선생은 1917년 이곳 요사채 안심료(安心寮)에서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했다. 다솔사를 특히 주목해야 하는 데는 이곳에서 불교계 대표 항일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이 태동한 데 있다. 만당은 1930년 5월 한용운 선생의 민족의식에 큰 영향을 받은 불교 청년들이 식민지 불교 극복, 불교 자주화, 불교 대중화를 기하려는 의식에서 시작됐다. 일본 다이쇼(大正)대학 불교과를 졸업한 신지식인으로 당시 이곳 주지로 있던 최범술(효당스님), 부산 범어사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민족해방과 불교 혁신에 힘쓴 김법린, 동양철학을 연구해 대한민국 건국 철학과 국민윤리 기반을 닦은 김범부 선생 등이 주축을 이뤘다. 이들은 다솔사를 근거지로 삼아 전국 각 지역은 물론 일본 도쿄까지 조직을 확장해 일제 침략 세력과 끊임없이 투쟁했다.

1932년에는 당원 80명을 확보하는 등 활발한 운동을 이어갔다. 당시 당원들은 엄수해야 할 서약으로 비밀한사엄수(秘密限死嚴守)와 당에 대한 절대복종을 약속했다. 모든 것은 기록을 남기지 않도록 규제됐다. 이 때문에 지금도 이들 활동과 관련한 1차 자료가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엄격한 내부 규율에도 일제 삼엄한 사찰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1938년 말 만당은 진주경찰서에 검거되기 시작했다. 사천은 물론 서울, 진주, 합천, 해남, 양산 등지에 불어닥친 경찰의 검거 열풍에 김법린, 장도환, 최범술, 박근섭, 박영희, 김범부 선생 등이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안심료는 훗날 김범부 동생 김동리가 소설 '등신불'을 쓴 곳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안심료 앞에는 한용운 선생과 만당 주요 당원들이 만해의 회갑을 맞아 심은 편백나무 15그루 중 3그루가 남아 올곧은 항일 기상을 대변하고 있다. 이렇듯 다솔사는 임진왜란부터 일제강점기 말까지 피 끓는 항일 정신이 아로새겨진 사천지역 항일구국운동 성지라 할 만하다.

◇들불처럼 번진 만세시위 = 사천지역 3·1항일독립운동 불길은 곤양면에서 가장 먼저 일었다. 이곳 송전리 출신 김진곤 선생은 1919년 3월 13일 밤 10시께 곤양공립보통학교(현 곤양초등학교) 기숙사에 가 생도 박계술 선생으로부터 필지묵을 빌려 백지에 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태극기를 만들어 포플러 나무에 매었다. 김진곤 선생은 박계술 선생과 때마침 학교에 온 조효제 선생에게 함께 만세를 외쳤다. 이후 김진곤 선생은 학교를 나와 독립만세를 쓴 태극기를 곤양주재소에 투입하고는 주민들을 규합해 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이후 4월 16일과 19일. 곤양공립보통학교 바로 옆 곤양장터에서는 당시 해인사 지방 학림 학생 최범술 선생과 그 동료의 주도로 장날을 맞아 곤양면과 서포면 등에서 모인 사람들의 만세 시위로 확대됐다.

1919년 3월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곤양공립보통학교(현 곤양초등학교).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곤양공립보통학교 만세 시위가 있고 일주일 여 뒤인 3월 21일. 당시 사천군 읍내면 사천공립보통학교(현 사천초등학교)에서도 만세 시위가 펼쳐졌다. 3월 18일 진주 만세시위에 참여한 황순주, 박기현, 김종철 선생 등이 진주 의거 중심 인물인 강대창 선생을 만나 사천에서도 거사할 것을 결의한 후 강달영 선생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 돌아왔다. 이들은 임순백, 윤수상, 김성언 선생 등과 사천공립보통학교 졸업반인 이윤조 선생을 포섭한 뒤 거사일을 21일로 정했다. 이날은 이 학교 졸업식과 함께 사천장이 서는 날이었다. 졸업식 전 학생들은 두 편으로 나뉘어 축구 시합을 했는데 시합에서 이긴 이윤조 선생이 갑자기 가슴에서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일본인 교장은 급히 이윤조 선생을 잡으려 했다. 이 광경을 본 학생들이 일제히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학교 측 연락을 받고 온 사천헌병대는 먼저 이윤조 선생을 검거한 다음 7일 뒤 황순조, 박기현, 김종철 선생 등을 검거했다.

◇삼천포 항일운동 중심 삼천포공립보통학교 = 일제 침탈이 가장 심한 삼천포도 예외는 아니었다. 진주 만세 시위를 주도한 강달영, 박진화 선생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 온 박종실 선생은 삼천포공립보통학교(현 호연재 자리) 교사 황병두 선생과 거사를 논의했다. 삼천포공립보통학교 제2회 졸업식이자 삼천포 장날인 3월 25일을 거사일로 정한 이들은 시위를 3대(隊)로 나누어 진행하기로 한다. 제1대는 황병두 선생과 학생들을 주축으로 노산에서, 제2대는 청년대를 주축으로 해변에서, 제3대는 면민을 규합해 장터에서 봉기하기로 한 것이다. 거사 당일 흥분한 학생들은 예정한 신호를 무시하고 졸업식을 기다릴 새 없이 교문을 박차고 나가 독립 만세 함성을 질렀다.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사천공립보통학교(현 사천초등학교)./김구연 기자

뜻밖의 만세 시위에 당황한 경찰은 학생을 검거해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이에 제2대 청년대는 장소를 해변에서 장터로 옮겼다. 장터에 사람이 모이자 박종실 선생 등 중심인물들이 "대한 독립 만세"를 크게 외치고 독립가를 불렀다. 경찰은 무장경관을 동원해 시위대를 강제 해산했다. 당시 삼천포공립보통학교는 조선 영조 46년 건립된 이 고장 대표 학당 호연재에 그 뿌리를 뒀다. 1919년 삼천포공립보통학교가 선구동 교사로 이전한 뒤 호연재는 민족혼을 일깨우는 불온사상 소굴로 지목돼 강제 철거된다. 선구동으로 이전한 뒤 삼천포공립보통학교에서는 1931년 수업료 대신 가산을 압류한 군 당국 처사에 반발한 학생들의 동맹휴학이 이뤄지기도 했다.

독립기념관 부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삼천포공립보통학교와 당일 만세 시위가 있었던 현 노산공원·동서동 주민센터 인근, 지금은 삼천포노인복지회관이 들어선 주재소 터를 연계한 답사 코스 개발 필요성을 제기한다. 또 관련 내용을 기록한 안내판을 호연재나 옛 시장 터에 설치하면 역사 교육 현장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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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천 기자

    • 김두천 기자
  • 창원시청과 시의회를 담당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