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이장님]거창 마리면 서편마을 이채호 이장

"미나리 좀 사이소." 지난해부터 이른 봄 미나리가 나는 철이면 거창군청을 비롯해 기관단체 사무실에는 푸릇푸릇한 미나리를 들고 나타나 호기 있게 외치는 이가 있다. 이 당당한 모습의 주인공은 바로 거창군 마리면 서편마을 이채호(67) 이장이다.

5년 전 서편마을로 귀촌한 이 이장은 이제 마을기업 리더로 자리 잡아 주민들이 안정적으로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고자 열심히 뛰어다닌다.

그도 한때 대도시(부산)에서 잘 나가는 삶을 꾸렸었다. 삼성전자 대리점과, 갈빗집 등을 운영하면서 경제적으로도 넉넉했으나 어느 때부턴가 하던 사업이 경기침체와 함께 시들해지자 마음을 비우고 귀촌을 결심하게 됐다.

그런 그에게 마을 주민들은 상대적으로 젊다(?)는 이유로 2011년 서편마을 이장직을 강제로 떠맡겼으며, 때마침 정부에서 2012년부터 마을기업 육성을 정책적으로 지원했다.

이채호 서편마을 이장이 마을기업 시설하우스에서 친환경 농법으로 재배한 미나리 한 소쿠리를 들어보이고 있다. /이상재 기자

이 이장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해 안전행정부(현 행정자치부) 마을기업 공모에 덥석 신청해 선정됐다. 하지만 워낙 사전 준비가 안 돼 있어 그해에는 포기하고 2013년 다시 신청, 재선정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나 이 이장은 서편마을에는 65세 이상 노인이 대부분으로 평균 연령이 워낙 높은 초고령 마을이어서 고민을 많이 했다. 이렇게 고령화한 마을에서 마을기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을지 의문이 자꾸만 커지고 자신감이 없어졌다. 하지만 몇 번씩 마음을 고쳐잡고 '위기는 기회'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격려하면서 포기보다 도전을 택했다.

가장 큰 어려움은 마을기업이 무엇이고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아무리 주민들에게 설명해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공감대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이장은 시간이 흐르면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으로 맨 먼저 나서서 마을기업 리더로서 역량을 쌓고자 군에서 권장하는 여러 과정의 교육을 받는 한편 선진지 견학도 수없이 다녀왔다.

그런 과정 속에서 그는 마을기업에 선정된 리더 대부분이 시설물이나 건축물 등 하드웨어 구축에 관심을 둬 자신은 유통과정이나 소프트웨어 쪽을 집중해 살펴보았다. 마을기업에 지원되는 보조금만으로는 기본 시설물 구축에 대부분 소진되는 것이 현실이었고, 그러다 보면 정작 원하는 사업을 할 수가 없어 결국 의욕만 가지고 일을 하다 도중에 포기하는 것을 지켜봤다.

이런 문제를 눈여겨본 이 이장은 시설 투자비가 가장 적게 들고 기본적으로 자연환경을 그대로 활용하는 친환경 농업에 유리한 분야를 찾게 됐다. 그 결과 동네 뒤편 묵혀 둔 언덕배기 논밭에 간단한 시설하우스를 설치하고 미나리를 비롯한 고사리, 도라지 등 청정 먹을거리를 재배하면 승산이 있겠다는 결론을 얻게 됐다.

마을 주민들과 의논해 사업 추진을 결의했다. 그리고 미나리 재배에 필요한 모종과 육묘법 등을 배우고자 전국 유명 미나리 재배지를 찾아다니는 고생을 마다치 않았다. 그렇게 애쓴 결과 이 이장은 경북 청도지역에서 미나리 모종을 구입해 재배를 시작했다.

그러나 쉽게 보이는 것도 직접 해 보니 쉬운 것이 없었다. 첫해에는 거의 수익을 얻지 못하고 경험을 쌓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올해에는 실패와 경험 덕분에 큰 수익은 없었지만 이제는 앞이 조금 보이는 것 같다고 말한다. 미나리도 미나리지만 고사리 또한 산에 종묘만 심어놓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막상 농사를 지어보니 마음대로 안 됐다. 이 이장은 농사란 서둘거나 욕심 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준비하며 공든탑을 쌓아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터득했다.

이 이장은 앞으로 좀 더 차근차근 준비해 주민의 공동체 의식을 높이면서 70세를 넘은 노인들이 하루에 몇 시간씩이라도 꾸준히 참여할 수 있는 일거리를 만들고 거기에서 얻는 소득을 잘 분배해 소외계층이 없이 골고루 잘사는 마을을 만들어 가겠다는 야무진 꿈을 키우고 있다.

또한 서편마을에서 생산하는 미나리와 고사리, 도라지 등을 믿고 사먹을 수 있도록 소비자들과 신뢰를 쌓으면서 돈만 보고 운영하는 마을기업이 아니라 양심을 가진 마을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싶다는 포부도 밝힌다.

현재 노인들이 하루 3∼4시간씩 일을 해 시간당 5500원 정도 벌어 갈 수 있지만 앞으로는 최소한 6∼7시간의 일거리를 만들어 드리고 싶은 욕심이다.

또 마을 주민 대부분이 고구마나 감자, 옥수수 등을 재배하지만 판로를 확보하지 못해 거의 공짜로 버리다시피 하는 실정이라 이 같은 어려움도 마을기업을 통해 해결방안을 찾을 계획이다. 장기적으로는 러시아와 당근 재배 등도 추진할 계획이란다.

농촌 마을 주민의 안정된 소득원을 창출하고 공동체 정신을 살려내는 이 이장의 열정에서 우리 농촌의 희망을 보았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