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항일독립운동, 현장을 기억하다] (5) 진주지역 사회운동

흔히 비봉산을 진주의 진산이라고 한다. 비봉산을 정신과 문화의 고향으로 여기는 진주시민들도 많다.

진주 객사와 동헌, 향청이 비봉산 기슭에 자리 잡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비봉산을 병풍 삼아 남강을 내려다보는 배산임수 지형이니 풍수학적으로도 진주만 한 곳이 없었을 테다.

남강 너머 너른 들에는 갖가지 곡식이 영글고 경제적 풍요는 학문과 문화, 예술 발달에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임진왜란 당시 안전한 보급로 확보와 물자 공급을 위해 진주성을 침공한 일본이 진주민에 행한 학살 만행과 1862년 농민항쟁으로 깃든 반외세 반봉건 정신은 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진보적 형태의 항일독립운동으로 표출됐다.

더구나 개화 바람을 타고 진주로 들어온 호주인 선교사들이 전한 자유와 박애, 평등 정신은 진주 정신을 더욱 살찌우는 계기가 됐다. 진주에 국채보상운동, 3·1만세운동, 형평운동, 청년운동, 학생운동 등 각종 사회운동이 활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객사 중심으로 이뤄진 항일독립운동

진주 객사는 고려 말부터 존재한 유서 깊은 건물이었다. 일제는 1908년부터 이곳을 진주재판소로 사용했다. 객사 건물은 1937년 허물어지는데 이 자리에 2층 벽돌 건물로 된 법원 청사가 지어졌다. 해방 후에도 진주법원이 자리를 지켰으며 진주문화방송이 있기도 했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섰는데 건물 앞 한 귀퉁이에는 이곳이 옛날 객사 부속 건물이 서 있던 자리임을 알리는 작은 터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을 위한 각종 사회운동은 객사를 중심으로 반경 1㎞ 내에서 주로 이뤄졌다.

특히 국채보상운동 집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대구에서 1907년 2월 시작한 국채보상운동은 3월 진주로 확산한다. 열기도 뜨거워 안택중·안효정·김기대 등 20명이 발기한 애국경남회는 애국상채소 사무실을 진주낙육학교(현 진주중앙요양병원 자리)에 두고 3월 13일과 19일 각각 진주군 단위와 경남도 단위 모금행사를 열어 수익금을 진주농공은행에 보관했다. 진주 객사 의봉루 앞에서도 관련 단체 활동이 이뤄졌는데 특히 객사 앞 연설회는 구름 같은 인파가 아홉 번 탄식하고 열 번 눈물을 흘렸다 할 정도로 호응이 대단했다.

예닐곱 군데에서 시발한 진주면 3·1만세운동 주력지는 진주재판소였다. 객사 동북쪽 호주인 의료선교사 커를(Dr. Hugh Currell) 부부가 세운 진주교회는 천민 백정 계급과 일본인 교인이 함께 예배를 보게 한 형평운동 시발로 이름나 있다. 또한 진주면 3·1만세운동 신호탄인 종소리가 이곳에서 울렸다.

호주선교회가 진주교회 옆에 세운 사립 시원여학교는 1939년 6월 신사참배를 거부해 일제로부터 자진폐교 통보를 받자 폐교신청서와 기독교 자유에 대한 탄원서를 함께 제출한 후 폐교했다. 시원여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폐교처분을 받은 첫 기독교계 학교였다. 폐교 후 교사는 진주사범학교 기숙사로 사용되다 한국전쟁 중 미군 폭격으로 전소했다.

진주 객사 북쪽 진주공립보통학교(현 진주중·진주고)는 1929년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해 이듬해 동맹휴학 운동을 벌인다. 진주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진주공립농업학교에서 일본인 교사가 학생들에게 행한 모욕과 극심한 차별 대우 소식을 듣고 1928년 7월 이 학교 학생들과 연맹해 조일공학제 폐지, 노예 교육 철폐, 조선어 시간 연장, 조선역사 교수, 교내 언론·집회 자유 보장 등을 요구하며 동맹 휴학한 전례가 있었다.

1930년 1월 17일 당시 3학년이던 조방제가 아침 조회가 끝나자 연단에 올라 만세 삼창을 하자 이를 신호로 이웃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현 갤러리아백화점, 옛 향청과 진주진위대 터) 학생들이 동참, 시위대는 500명으로 급증했다. 시위대는 시내를 돌면서 노예교육 폐지, 경찰 학내 침입 금지, 광주학생 석방 등 구호를 외쳤다. 이후 진주제일공립보통학교, 시원여학교도 동맹휴학을 단행해 이날 진주는 식민교육 반대 열기로 가득했다.

진주 항일사회운동 구심, 청년회관

객사 서남쪽 옛 진주낙육학교 뒤편에 있던 진주청년회관은 이른바 진주 내동면 삼계리 박 부자로 통하는 박주형의 둘째 아들인 박재표(1886∼1951)에 의해 설립됐다.

이 집안 형제들은 아버지가 물려 준 막대한 재산을 이용해 독립운동에 힘썼는데 첫째 박재호는 의병운동 지원은 물론 진주고, 진주여고 설립 당시 발기인 겸 초대회장을 맡아 교육 진흥에 힘썼다. 박재표는 청년회장을 4년 동안 역임하고, 이후 신간회 진주지부도 3년여 이끌었다. 청년회관 1층에는 유치원을 개설해 매월 지원금을 제공하고 회관 앞 공터는 축구장을 만들어 청소년들이 마음껏 뛰놀 환경을 조성했다. 셋째 박재수는 3·1만세운동 때 경남유림대회를 열어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이같이 지역 독지가가 세운 청년회관을 주로 활용한 것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이었다. 농민항쟁 때 발현해 이어져 온 진주지역 저항적 농민·노동운동이 이곳에서 꽃을 피웠다. 특히 1922년 2월 발기모임을 통해 탄생한 조선노동공제회 진주지부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들은 진주노동공제회로 이름을 바꾼 후 1928년 초까지 활동하며 1920년대 진주지역 사회운동에 중추적 역할을 한다. 1922년 9월 전국에서 처음으로 소작노동자대회를 열고, 1924년에는 삼남지방 노동·농민단체 대표자가 모인 경남노농운동간친회를 주관했다. 진주노동공제회는 이들 활동을 바탕으로 지역을 넘어 전국적 수준의 사회운동 단체로 자리매김했다.

진주청년회관에서 열린 소작노동자대회는 특히 다른 지역 농민운동에 끼친 파급이 대단해 설립 1년이 채 되지 않아 문산면을 제외한 전 군에 출장소 18개, 인근 사천·하동에 4개 지회가 설립되는 성과를 낳았다. 이들 출장소는 이후 소작조합 조직으로 개편됐다. 진주노동공제회 활동을 이끈 강달영은 훗날 조선노동총동맹 중앙집행위원, 조선공산당 책임 비서 등 역할을 하며 항일민족통일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1926년 순종황제 인산일에 맞춰 단행한 6·10만세운동을 조직하고 조선공산당 재건에 힘쓰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살이를 했다. 강달영은 출소 후 모진 고문으로 정신병을 얻어 피폐하게 생활하다 해방을 3년 앞둔 1942년 숨을 거뒀다. 이 밖에 진주교회에서 시발해 진주좌 터에서 창립기념식을 한 형평사 운동과 관련한 각종 논의 역시 주로 이곳에서 이뤄졌다. 진주청년회관은 이렇듯 항일독립운동에 관한 사상과 이념, 방법론을 모두 아우른 명실상부 항일독립을 위한 사회운동 구심으로 역할을 했다.

사라진 흔적, 흩어진 기억

이들 진주 객사 주변은 나름대로 역사를 기억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진주 객사와 향청이 있던 자리에 이곳이 어떤 곳이었는지 기억하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진주좌 터에도 이곳이 형평사 창립축하지임을 알리는 조형물이 놓여 있다.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 자리에는 진주중학교와 진주고등학교가 그 명맥을 잇고 있는데 학교 차원에서 항일학생운동 관련 기념사업을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이 일대 항일독립운동을 종합적으로 조명하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독립기념관은 이를 위해 진주 객사와 향청(옛 진주진위대,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 터) 표지판에 이곳이 국채보상운동과 의병운동, 학생운동이 일어난 곳임을 병기할 필요성이 있다고 조언한다.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 동맹휴학지는 학교 차원이 아니라 시민을 상대로 한 역사교육 장이 되도록 기념관을 활용하면 좋겠다는 의견이다. 또 진주교회와 시원여학교 터 등은 비록 건물터뿐이지만 구 진주교회 터, 배돈병원 터, 광림학교 터, 선교사 사택 등과 연계해 진주지역 근현대사 교육 자료로 삼을 것을 제안했다.

진주청년회관 터 역시 진주노동공제회 역사적 의의를 고려해 위치를 정확히 파악해 두었다가 형평사 관련 사적인 진주좌 터와 연계해 역시 근현대 역사 자료로 삼을 것도 권하고 있다.

한데 형평사 창립축하지 관련 조형물은 진주좌 터에 들어선 대형 쇼핑몰 건물 처분이 진행되면서 해체 위기에 몰렸다. 이를 보존하는 방안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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