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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난리 걱정 큰 강변 마을 '도깨비보'전설이 흐른다

[남강 오백리](14)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 명동마을∼단성면 묵곡리

권영란 기자 kyr65@idomin.com 2014년 12월 12일 금요일

남강 물길은 산청군에 접어들어 '경호강'으로 불리며 지방하천으로 분류, 경남도가 관리한다. 물길이 신안면 갈전리 입구 '산성 구석다리'쯤에 이르면 다시 국가하천으로 분류, 국토교통부가 관리하고 있다.

산청읍을 지나 신안면으로 들어선 물길을 톺아가는 것은 이곳이 고향인 아버지(권태현·76)의 옛 기억을 따라가는 걸음이 되었다. 해방 전후 이곳 경호강과 유역 일대에 얽힌 이야기는 많은 부분을 아버지와 이곳 어른들의 구술에 의존했다.

물길은 신안면 신안리에서 단성장으로 가는 옛 나루터를 지나 단성교 아래에서 양천과 합수하여 '원지 두물머리'를 이룬다. 그리고는 태풍 때마다 잦은 범람으로 침수 피해를 입어야 했던 단성면 묵곡리, 소남리로 흘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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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신안 나루터와 '밀침방아'

신안리 명동마을은 신안역(新安驛)이 있던 곳으로 짐작된다. 인근 주민들은 명동마을로 불리기 전에 이곳이 '구역(舊驛)터'라 불렸음을 강조한다.

"이곳 사람들은 구역터라 불리는 것을 싫어했제. 역이라는 게 대부분 장사치들이 드나들고 흥청대는 주막거리라 생각하니…."

아버지는 '구역터'가 왁대고개를 넘어 강변 쪽이 아니라 백마산성 아래 골짜기 입구에 있었다고 말한다. 현재는 국도 3호선이 왁대고개를 지나 명동마을과 백마산, 적벽산 아래를 차례로 지나면서 골짝마을과 강변마을로 갈라 놓았다.

"왁대고개에서 강으로 난 꼬부랑길이 단성장으로 가는 길이었던 기라. 지금은 밭에 일하러 가는 길이 되면서 마이 넓어졌지만…. 단성장으로 갈라모는 여게 나루에서 배를 타야 되지. 안봉리 안봉·수월마을, 외송리 등 주민들은 왁대고개를 넘어와 요기서 배 타고 단성장에 갔으니께."

장날이면 배가 출렁거릴 정도로 사람들이 많던 시절이다. 파장 무렵에는 배를 타는 사람으로 길게 줄을 섰다가 배가 두어 번 왕복을 해야 겨우 타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말한다. 1953년 단성중학교가 문을 열면서부터는 배를 타고 가는 학생들이 점차 늘어났다.

신안면 명동마을에서 강 건너는 단성면 강누리 들머리다. 탁영 김일손의 <두류기행록>에 따르면 사근역에서 산청-신안역-단성현-남사리를 거쳐 단속사에 이르렀다. 스승인 점필재 김종직이 두류산(頭流山)을 찾은 행적을 좇아 탁영이 그대로 발길을 옮겼다 했으니 탁영도, 점필재도 모두 이곳에서 나룻배를 탔고 강누리 들판으로 난 길을 따라 당시 단성현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옛 사람들이 배를 타기 위해 북적대던 강누 나루터 근처에는 단성 양수장이 들어서 있다. 양수장 뒤 대밭 옆으로는 경호강 물을 퍼 강누 들판으로 가져가던 수로가 아직 남아있다.

"사변 이후 수리조합이 만들어졌는데, 수리조합이란 게 쉽게 말하자면 논에 물을 대어야 하는 사람들이 물 푸는 것을 공동 운영하는 조합을 말하는 기라. 그때야 쌀농사가 돈이 더 된다고 밭을 전부 논으로 바꿨으니…. 논농사에는 물이 꼭 필요하고…."

강누리는 원래 강변 들녘이라 무, 배추 농사를 많이 했다. 둔철 등 골짜기 사람들은 배를 타고 건너와 대부분 이곳 강누리에서 배추, 무 등을 사서 김장을 했다. 배춧속이 여물 때면 가을걷이 끝낸 인근 마을 사람들이 배에다 배추무더기를 실어 날랐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제작한 <단성현지도>에는 신안역에 사창이 있었다 한다. 사창은 곡식을 저장했다가 흉년이 들었을 때 백성들에게 빌려주는 곡물 대여기관을 말한다. 신안역 남동쪽이라지만 지금으로서는 어디쯤이었는지 짐작하기가 어렵다.

아버지(권태현·76)가 강누 나루터 자리에 서서 '신안역' 위치를 설명한다.

다만 현재 명동마을 주민들 말에 따르면 경호강가에 큰 방앗간이 있었다. 국도 3호선이 지나는 '산성 구석다리' 닿기 전이다. 그런데 흔히 알고 있는 물레방아가 아니었다.

"'밀침방아' 또는 '밀친방아'라 했는데…. 쌀보리 방아 찧고 정미소 역할이었제. 물은 많지만 낙차가 안 나니까 밑에서 밀쳐서 방아를 찧고 그랬는데…. 물레가 크고 넓어야 됐제. 사변 후에도 있었는데 얼추 1960년대 이후 발동기 생기고 나서 없어진 것 같네."

물이 많은 큰 강에야 가능했던 방아였다. 규모가 제법 커서 이 일대 주민들에게는 이야깃거리였다.

적벽산과 읍청정(揖淸亭)

백마산(262m)은 아래 적벽산(160m)과 함께 경호강 물길이 빚어놓은 벼랑이다.

"적벽 벼랑 가운데 바위에 송시열이 쓴 '적벽(赤壁)'이란 한자가 새겨져 있어 건너편 강누리에서나 강에서 뱃놀이를 할 때면 글자가 보일 정도라 했는데…. 지금은 당최 보이지가 않아. 오데 있을 건데."

오래전부터 경호강을 가운데 두고 신안면 신안리와 단성면 강누리 일대 강변 풍광은 그냥 지나치기 힘들 만큼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혔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강가 숲에 신안루, 경연, 담분, 유취, 매연, 우화 등 여섯 개의 누각이 줄지어 있었다.

이곳이 강성군이던 시절, 태수가 달밤에 기생과 함께 배를 타고 물을 거슬러 올라가며 술을 마시다가 적벽에서 돌이 굴러떨어져 배가 뒤집히고 물에 빠지는 바람에 고을의 인장(官印)을 잃어버려 파직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이 일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만큼 정신을 빼놓고 놀기 좋을 곳이었던가 싶다.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누각은 없다.

"마지막까지 있던 게 신안루였는데 그것도 1936년 병자년 대수에 다 떠내려갔다더라. 강가 숲도 다 떠내려가고…."

간신히 남아있는 건 석초 권두희 선생이 1919년에 완성한 '시를 읊고 즐긴다'는 읍청정(揖淸亭)이다. 적벽산에서 바라보면 강 건너 강누리 강변에 있다. 강변 유역을 넓히면서 마을 쪽으로 옮겨진 읍청정은 원래 강가에 있었다. 지난 2000년 8월 경남도 문화재자료 290호로 지정되었다.

인위적으로 강둑을 높이고 도로가 닦이는 등 지형이 바뀌면서 옛 풍광은 많은 부분이 손상됐지만 경호강 물길과 적벽산 벼랑에서 옛 정취를 찾을 수 있다.

"경치가 좋은 곳이지만 물난리가 여러 번이었제. 1987년 셀마 때 이 일대 다리들이 전부 물에 쓸려갔제. 산청읍에서부터 차례로 성심교, 수산교… 원지마을과 단성을 잇는 단성교도 무사하지 못했고…."

신안리와 단성면 강누리는 강을 끼고 있는 곳이라 침수 피해가 많았던 곳이기도 하다. 2002년 태풍 루사 때는 가옥 25채와 농경지 26ha가 침수피해를 입었다. 당시 주민들은 한밤중에 단성중학교 강당으로 대피하는 등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2012년 11월 산청군 신안면 적벽산에 올라 내려다본 단성교와 경호강. /경남도민일보 DB

원지 두물머리와 양천 이야기

단성교를 지나면 원지 둔치가 넓게 펼쳐진다. 경호강과 양천이 합수하는 두물머리이다. 양천은 합천군 쌍백면 등지에서 서남쪽으로 흘러온 70리가 넘는 물줄기이다.

양천에서 주목할 만한 곳은 산청군 생비량면 도전리 장란마을 앞이다. 강폭이 넓어지면서 물살이 세고 수량이 풍부한 곳이다. 야트막한 보(洑)의 물고랑마다 맑은 물줄기가 콸콸 흐르고 있다. 무엇보다 마을 근처에서 만난 이동진(80) 아재가 들려준 이야기는 장란·대둔마을 등 이 일대 마을들이 치수 때문에 겪은 어려움이 묻어있다.

"도깨비보 이야기해주까?"로 말문을 튼 이동진 아재의 이야기는 조금은 변형된 채 강을 낀 동네에서 있음직한 이야기이다.

산청군 생비량면 도전리 장란마을 앞 '도깨비보'.

"여게 마을들이 맨날 보 때문에 힘들었던 기라. 물살이 센 데다가 홍수가 나면 휩쓸려가버린께. 맨날 짓고 쓸려가고 짓고 쓸려가고 이랬던 거제. 그런데 온제 밤중에 도깨비가 떼로 나타나서 메밀죽을 끓여달라 해서 마을 사람들이 몇 솥을 끓여 대접을 했제. 그랬더니 도깨비들이 큰 바위들을 턱턱 들어다가 밤새 100m가 넘는 보를 만들어삔 거제."

물론 지금 보는 도깨비가 만든 것이 아니다. 하지만 보의 위치는 그대로라고 말한다.

장란보를 지나온 양천 물길은 신안면 문대리에서 신등천 물줄기를 합해 청현·신기리 들판을 타고 흘러 원지 두물머리에 닿는다. 강 가운데 어느 때는 섬이 생기기도 하고 어느 때는 사라진다. 남강댐에서 물 조절하는 데에 따라 이곳 두물머리 풍경은 조금씩 차이가 있다.

물길을 모아 진양호로 향하다

단성면 묵곡마을 앞이다. 근처에는 성철 생가인 겁외사가 있고 2010년 조성한 묵곡생태공원이 있다. 원지 두물머리에서 넓은 자갈밭을 부려놓던 강변 유역은 묵곡교를 지나면서 물길 가운데 여기저기 웃자란 물버들과 수생식물을 펼쳐 놓는다.

30명 가까운 사람들이 무밭에서 일을 하고 있다. 비온 다음날 짱짱한 햇볕에 무청이 더욱 시퍼렇다. 고랑마다 희고 길쭉한 무가 드러누워 있다.

"다깡무시라요. 비가 온 뒷날 무시가 잘 뽑히니까 땅 굳기 전에 일꾼 대어 퍼뜩 해야지예."

밭주인 부산댁(56) 아지매는 마음이 급했다. 일꾼들이 하도 많아 인건비 제하고 나면 돈이 될까 싶다.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부산댁(56) 아지매가 강변 무밭에서 일하고 있다.

"아, 반반이라 생각하면 되지예. 일삯 제하고…. 갈라먹기라예. 요새는 그래도 시래기가 돈이 되가꼬 좋거만. 이리 해놓으모는 무시 가져가는 사람 따로 있고, 시래기 가져가는 사람 따로 있고…. 다 돈이 됩니더. 옛날에야 시래기는 안 묵을끼라고 천지에 버렸다아이요. 먹을 게 없는 사람들이나 주워가꼬 갔제. 요새는 몸에 좋다하니까 돈 있는 사람들이 더 찾아먹는다 아이요."

묵곡리는 '묵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예전에는 물이 범람을 하던 곳이다. 부산댁 아지매는 강둑을 높이고 묵곡생태공원을 조성한 뒤부터는 그런 일이 없고 오히려 마을이 훤해졌다고 말한다.

"내가 시집온 지 30년이 넘었는데 그때 오니까 묵곡교 있는 자리쯤에 좁은 쎄멘다리, 잠수교 같은 게 있었지예. 그전에는 거기가 나루터여서 줄배가 있었다쿠네. 요기서 단성장에 가려면 다 강을 건너야허니까."

물길은 이제 1970년 남강댐 건설 때 만든 낙동강 수계 최초의 다목적 인공호수 '진양호'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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