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강한 농업 강소농을 찾아서] (36) 정홍륜 거창 경남중앙농원 대표

겨울, 바람이 분다.

메마른 바람이 앙상한 가지 사이를 감아 돈다. 한겨울 과수원. 잎사귀 하나 달리지 않은 겨울나무는 허연 가지만 계절에 부대끼고 있다.

그 들판에서 보통 사람은 황량함을 보지만, 과수원 주인의 눈에는 계절이 바뀌고 바뀌어 사과가 주렁주렁 열린 모습이 들어온다.

겨울나무 가지를 하나 잘라줄 때마다 남은 가지에서 몇 개월 후 탐스런 과일이 열매 맺어 자라는 모습을 본다. 마치 이제 걸음마를 떼는 딸아이를 두고 먼 훗날 결혼식장에서 딸의 손을 잡고 들어가는 장면을 보는 아버지처럼.

거창군 거창읍에서 경남중앙농원이라는 과수원을 운영하는 정홍륜(61) 대표. 지역 사과 농민들이 모여 만든 '억수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한 정 대표는 사과 2만 6400㎡(8000평)와 복숭아 9900㎡(3000평)를 키우고 있다.

"올해로 사과 농사 40년째입니다. 부친이 이곳에서 사과농사를 지은 것까지 계산하면 이곳에서 60년을 농사지었네요. 고교 졸업 후 대학을 가고 싶었죠. 하지만, 갈 형편이 못 됐습니다. 또, 물려받은 땅에서 마땅히 일할 사람이 결국 제가 이곳에 정착하게 됐습니다."

예전에는 밤나무가 자라던 곳. 곳곳에 골짜기 경사가 져 있는 지형이었다. 정 대표는 40년 세월동안 과수원을 운영하며 땅을 정리, 반반하게 만들어 마치 야트막한 언덕처럼 만들었다.

"일종의 선구자, 선발대 역할을 했습니다. 신품종 도입이나 기술 적용을 남보다 먼저 했죠. 그만큼 시행착오를 너무 많이 겪었습니다. 품종 선택을 잘못해서 돈을 못 벌고 다시 품종을 바꾸는 악순환을 겪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홍로와 부사를 주로 키웁니다."

정홍륜 거창 경남중앙농원 대표가 사과나무 가지치기를 하고 있다. /이원정 기자

수확하고 지금 같은 겨울이 되어도 과수원은 그냥 방치되는 것이 아니다. 한겨울 열심히 새봄을 준비해야 풍성한 가을을 맞게 된다.

그래서 정 대표 등 과수원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요즘 나무 전정을 한다. 전정(剪定)이란 가지를 잘라주는 일로, 나무의 형태를 만들어 주는 작업이다. 부러졌거나 약해서 이상이 생긴 가지를 제거하고, 혼잡한 부분의 가지를 정리한다. 과수원의 겨울철 중요한 작업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가지를 잘라내는 것이 아니다. 가지 하나를 자를 때도 다가올 가을을 생각하며 쳐내야 한다. 어떤 가지를 잘라야 다음에 나무가 잎으로 뒤덮이고 사과가 달렸을 때 햇빛을 잘 받을 수 있을지를 머릿속에서 그림 그려야 한다.

전정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지역에 따라, 사람에 따라 적절한 방법을 선택한다.

"옛날부터 농사를 지었던 사람들이 자기 손으로 직접 전정하거나, 몇 사람이 같이 힘을 모아 서로 전정을 하곤 했습니다. 예전에는 대구에서 배워 전정하기도 했죠. 그러다 전북 장수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 송재득 씨가 제자들과 전국으로 다니면서 전정하고 강의하다 거창에 교육을 온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구경하러 다니다가 결국 같이 다니며 배워야겠다 싶었죠. 인건비도 받지 않고 보름씩 그렇게 전국을 다녔습니다. 그게 1980년대 중반 일이네요."

그렇게 '실전'에서 전정 기술을 터득했다. 전국 많은 과수원에서 가지를 잘랐다. 그러다 지역에서 기술을 전파하고 지역 사과 농사를 발전시키는데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지난해 12월로 창립 20주년이 된 '억수회'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정 대표가 꼽은 억수회의 역할은 첫째 지역 후계체제를 키우는 것이다. 그리고 과수 분야 신기술을 제일 먼저 도입해 시범적으로 적용하는 선구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회원 간 공동 작업으로 전체의 발전을 이끈다.

"보통의 작목반은 동네 중심으로 구성됩니다. 하지만, 억수회는 같은 작목을 하는 사람을 모아서 만들었습니다. 저 말고 창립멤버가 2명 더 있는데, 3명이서 전국을 다니다가 남의 동네 사과 농사만 잘 되게 할 것이 아니라 거창에서 팀을 구성해서 회원을 모집, 회원 집 품앗이를 하며 전정도 하고 농사 기술도 습득하고 교육도 하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거창 농업기술센터 성낙삼 계장(왼쪽)과 정 대표가 과수원을 둘러보고 있다.

8명의 회원으로 출발한 억수회는 현재 17명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억수회는 회원 가입이 까다롭습니다. 옛날 것만 고집하는 사람은 넣지 않기 위해 당시 젊은 회원들을 모집했습니다. 처음에는 나이 제한도 했었죠. 그러다보니 저보다 나이가 많은 회원은 없네요. 하하하."

억수회는 회원 농가 전정 품앗이뿐 아니라 농사에 도움이 되고 발전시키는 많은 사업을 하고 있다. "전정 기술을 혼자만 알고 혼자 농사 잘 지으면 욕을 얻어먹겠죠. 그래서 전문가를 초청해 교육도 했습니다. 품목별 전문 교육도 마련했죠. 처음에는 무료 교육을 하다가 '투자를 해야 잘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교육비를 5000원, 1만 원 정도 받기도 했습니다." 이 외에도 억수회는 퇴비·비료 등 회원들이 필요한 것을 파악해 공동구매를 하고 있다.

"회원 농가에서 1년 필요한 양을 파악해 가을에 공동구매합니다. 대리점들에서 가을 수확기 후에는 수요가 없어 재고물량을 반품해야 하기 때문에 싸게 구입할 수 있거든요. 그때 현금으로 대량 구매하면 아주 싸게 살 수 있습니다."

전국에서 사과 농사를 잘 짓는다고 소문난 사람들의 과수원에 견학가면 전정이나 유인하는 방법, 나무에 열매를 다는 방식이 다 다르다.

정 대표의 과수원 사과나무들은 가지들이 옆으로 팔을 벌리고 선 모습이다.

"전정의 제일 중요한 목적은 햇빛이 잘 들어가게 하는 겁니다. 가지 배치를 잘하고 겹치는 것이 없도록 가지를 잘라줘야 합니다. 우리는 위는 좁고 아래는 넓어서 우산을 접은 듯한 모습의 '세측지 방추형'의 모습으로 전정합니다. 전정은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정 대표는 올해 지정 3년째인 강소농이다. 그런데 정부의 강소농 지원에 대해 아쉬운 점도 많다고 했다. "작지만 강한 농민을 육성하는 것이 강소농인데, 현재 선정되는 농가를 보면 면적이 크면서 약한 농가도 많습니다. 또 정부는 작목반이나 영농조합 등에 각종 사업 지원을 많이 하는데, 강소농은 개인이라 그런 지원을 받기가 힘듭니다. 개인이 실질적으로 경쟁력을 키울 수 있도록 시설이나 기타 여러 가지 지원이 많았으면 합니다."

이에 대해 정 대표 과수원에 들러 이야기를 나누던 거창군 농업기술센터 성낙삼 계장은 "작다는 것은 대규모 영농을 하는 외국에 비해 작다는 것이다. 그리고 강소농 교육은 기술 확립과 브랜드, 마인드 등에 중점을 둔다. 강소농을 모아서 교육할 때 농민들 간 품목이 달라서 기술 교육은 어렵다. 그래서 마인드 교육으로 강한 농민으로 거듭나도록 돕는 것"이라며 상황을 설명했다.

정 대표의 현재 어려움은 과수원이 오래 됐다는 것이다. 즉 60년 가까이 그 땅에서 사과나무가 자라다보니 나무가 병 들고 잘 자라지 않는 연작피해가 오고 있다. 몇 년간 휴경해야 하는데, 그럴 상황도 못 된다.

정 대표는 사과나무 품종 개선과 작목 변경으로 돌파구를 찾고 있다. 3000평의 복숭아도 그래서 심게 됐다.

"억수회는 기금을 마련해 2~3년에 한번씩 일본·중국 등에 견학 갑니다. 이제는 기금을 더 모아 농업 선진국이라는 네덜란드 등 유럽으로 가고 싶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선진지 견학으로 지역 농민들의 활로와 발전방안을 찾고 싶습니다."

봄, 바람이 불어온다.

<추천 이유>

△황갑춘 경상남도농업기술원 원예수출담당 = 중앙농원 정홍륜 대표는 40년 동안 과수원을 운영하면서 항상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 실천하는 선구자입니다. 사과·복숭아 과수원을 시험농장으로 운영하고 항상 본인의 소득창출보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농가입니다. 초창기에 사과밀식과원 조성 시범사업 등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였으며, 또한 새로운 기술을 농가가 조기에 숙련하여 관내 17명으로 구성된 과수작목반인 억수회를 조직, 전정, 병해충 방제 등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봉사활동은 물론 과학영농 실천과 새로운 농촌문화 창달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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