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게 이런 곳] 진주 형평운동기념탑

'형평운동'은 1923년부터 1935년까지 진주에서 있었던 '백정신분 해방운동'이다.

1920년 당시 진주 인구 2만 4000명 가운데 백정이 350명가량 됐다고 한다. 봉건적 신분제도는 깨졌다 하더라도 백정에 대한 멸시 눈초리는 여전했다.

형평운동 시발점은 진주교회에서 있었다. 1907년 백정들과 일반신도들이 함께 예배보려 하자, 일반신도들이 강하게 거부해 7주 만에 뜻을 접게 됐다. 또한, 백정 자식은 학교에서 그들만 따로 수업을 받게 하고, 기생들조차도 백정들 모임에는 참석하지 않는 일들이 계속됐다.

그렇다 하더라도 백정들 가운데는 경제력이 탄탄한 이들도 많았다. 1920년대 초에는 상설시장에 가게를 얻은 백정상인도 있었다. 경제력이 바탕에 깔리면서 교육에 대한 열망도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것은 곧 불평등 타파 의식으로 더 깊숙이 자리 잡았다.

더 이상 참지 못한 백정들은 당시 지식인인 강상호 선생을 찾아 하소연했다. 이를 계기로 1923년 당시 진주청년회관에서 '형평사' 설립 발기인대회와 창립총회가 열렸다.

형평운동을 이끈 강상호 선생 무덤.

중앙집행위원에는 직업 운동가뿐만 아니라 경제력을 바탕으로 백정사회를 이끌던 이도 이름을 올렸다.

형평사는 진주에 본사를 두고 분사까지 두는 전국 조직을 구축했다. 당시 전국 백정 수는 약 40만 명가량으로 추정됐다.

창립 1년 만에 전국에 12개 지사·67개 분사가 만들어졌다. 창립 5년 후에는 활동가 숫자가 1만 명 문턱에까지 이르렀다.

'형평사' 명칭 제안한 신현수 선생 송공비.

이러한 확산분위기와 함께 반대 움직임도 동시에 진행됐다.

기생조합이 형평사 창립 축하 자리에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 진주 농청 대표자들은 모임을 통해 소고기 불매운동을 결의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조직 내부 분란도 있었다. 본부를 서울·진주 중 어디에 둘 것인지에 대한 부분, 그리고 소위 말하는 온건파와 급진파의 의견 대립도 이어졌다.

그렇게 세력이 약해지면서 일제 탄압까지 더해졌다. 마침내 1935년 대동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백정신분해방운동 성격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

형평운동은 백정신분운동에서 시작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 존엄성, 권리 존중, 평등 실현에 대한 것들이었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 정신을 잇겠다는 움직임은 진주에서 계속되고 있다.

1992년 형평운동 70주년 기념사업회가 구성됐다.

사업회는 1996년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일에 맞춰 '기념탑'을 건립했다. 진주성 앞에 자리하고 있다. 진주성에 오르면 백정 집단거주지로 추정되는 옥봉동 일대가 내려다보인다.

회원·시민 1500명 모금을 통해 1500만 원을 들여 조성했다. 조형물은 남녀가 손 맞잡고 발맞추는 형상이다. 차이로 인한 차별을 하지 않고 서로 존중하자는 의미가 담겨있다. 기념탑에는 '형평정신'이라는 네 글자도 눈에 크게 들어온다.

1996년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일에 맞춰 건립한 진주 형평운동 기념탑.

진주극장이 있던 자리는 형평사 창립 축하식이 열린 곳으로 기념사업회에서 기념석을 세웠다.

석류공원 아래에는 형평운동을 이끈 강상호 선생 무덤이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망경산 봉수대 옆에는 민족계몽운동 펼쳤고 '형평사' 명칭을 제안한 신현수 선생 송공비가 자리하고 있다. 애초에는 섭천못(현 망경초등하교) 주변에 있었는데 매립이 진행되면서 몇 차례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하다 2003년 이곳에 정착했다.

손을 맞잡은 남녀가 발 맞춰 나아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형평운동 기념탑 조형물.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