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철학 다르지만 하나같은 예술혼 '깊은 울림'

지난 2010년 한 해 클래식계 화두는 쇼팽과 슈만이었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 음악계는 1810년에 태어난 동갑내기 두 작곡가 200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공연으로 넘쳐났다. 피아노 음악에 있어 둘은 서로 존경을 표하는 친구이자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라이벌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이 두 사람이 태어난지 딱 3년이 지난 1813년. 이 해에는 '오페라'로 세계 음악계를 양분한 두 거장이 세상에 태어났다. 바로 주세페 베르디(1813~1901)와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다. 이 두 사람은 올해 탄생 200주년을 맞았다. 이는 쇼팽과 슈만이 그랬던 것 처럼 올 한 해 세계 클래식계를 떠들썩하게 할 가장 매력적인 주제다.

음악의 새 시대를 연 혁명가 바그너와 오페라 종주국인 이탈리아 전통을 계승·수호한 베르디. 두 사람은 살아온 인생, 작품 기질, 여성 편력까지 전혀 다른 행보를 보였지만, 오페라계 최고 경지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닮은 꼴 거장이다.

두 사람은 정식 음악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며 따라서 누구의 문하생이 된 적이 없는 독학파였다. 바그너는 독일 악극의 정통성을, 베르디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정통성을 각각 확립하였지만 어떠한 도움과 영향 없이 그들 스스로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이러한 두 사람은 출생연도는 물론, 첫 성공작이 각자의 세 번째 작품이며 모두 1842년에 초연됐다는 점까지 묘하게 일치한다.

바그너는 첫 작품은 무대에 올리지도 못하고, 두 번째 작품은 처참한 실패를 맛봤다. 이후 1842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세 번째 작품인 <리엔치>로 큰 성공을 거뒀다. 베르디 또한 첫 작품과 두 번째 작품은 모두 흥행에 실패한 뒤 1842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발표한 세 번째 작품 <나부코>로 큰 성공을 거뒀다.

이들 성공작을 만들 당시 전후 사정이 두 사람 음악 인생에 전환점이 됐다. 베르디는 앞선 두 번의 실패 이후 병으로 딸과 아내를 모두 잃는 불운속에서 <나부코>를 썼다. 비극속에서 희극을 써야 했던 베르디는 작곡을 포기하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마음을 고쳐 먹고 다시 쓰게 된 것이 <나부코>다.

   

<나부코>의 성공으로 심신이 안정된 베르디는 특유의 성실성을 바탕으로 1860년대 초까지 거의 한 해도 쉬지 않고 작품을 발표했다. 특히, 테너 가수의 정부였던 소프라노 가수 스트레포니와 동거를 했는데, 그녀는 훗날 베르디 오페라 중 대표작이 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주인공 비올레타의 모델이 됐다.

반면, 대담한 전략형 관리자 스타일인 바그너는 예술가가 이끄는 사회를 꿈꾸며 1849년 드레스덴 혁명에 참여했다가 망명객이 돼 15년 가까이 고국땅을 밟지 못했다. 바그너는 망명 중에 자신의 은신처를 마련해 준 은인의 부인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바이에른에 복귀한 후에는 친구이자 당대 최고 지휘자인 한스 폰 뷜로의 부인 코지마와 스캔들을 일으켜 세간에 화제를 불러모으기도 했다.

이러한 두 사람은 악풍에 있어서도 큰 차이를 보였다. 이탈리아인, 독일인이라는 국적과 기질 차이가 음악에서도 드러난다. 베르디 음악은 간명한 반면, 바그너는 철저했다.

베르디가 선율과 노래에 뛰어났다면, 스스로 대본을 집필한 바그너는 작품 전체 극적 전개를 중시했다.

또한, 베르디는 오페라 속 주인공들을 선량하거나 나약하게 그려, 인간적 감동을 추구한 반면, 바그너는 신화적이고 초인적인 힘을 자랑하는 인물들을 내세워 연출 내용면에서도 선이 굵은 작풍을 선호했다.

한 음악평론가는 "바그너는 과감하게 오페라의 전통을 던져버리고 '악극'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혁명가였으며, 베르디는 급변하는 시대의 요구에도 끝까지 전통적인 오페라 스타일을 포기하지 않은 보수주의자였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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