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게 이런 곳] 함안 고려동 유적지

1392년 멸망한 고려. 하지만 600년 지난 오늘날에도 고려는 남아있다.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에 '재령 이씨' 후손 30여 가구가 모여 살고 있는 '고려동 유적지(경남도 기념물 제56호)'다.

이오 선생은 고려 말 성균관 진사였다. 재령 이씨 족보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공민왕 때 상장군을 지냈고, 형은 공양왕 때 이성계 등극에 반대해 유배지로 가는 도중 숨을 거뒀다 한다. 이오 선생 역시 새로 들어선 조선 왕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려 유민으로서 절개를 끝까지 지키기로 했다. 몇몇과 함께 남쪽으로 향했다.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까지 흘러온 선생은 이 땅에 활짝 핀 백일홍이 천지에 널려 있는 것을 보고 거처로 정하기로 했다. 바깥과 단절하기 위해 담부터 쌓았다. 우물을 파고 작은 논밭을 일구었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음식은 받아들이지 않고 자급자족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서는 '고려동학'이라는 비석을 세웠다. '고려 유민 거주지'라는 뜻이다.

다음은 이오 선생이 나무 아래서 지었다는 시다.

밤마다 바다에서 떠오른 외로운 달을 맞이하고,

해마다 구기자 국화 심을 작은 밭을 개간하네.

끝내 돌아봐도 요순시대는 만날 수 없으니,

소먹이 나무꾼 동무 됨을 만족하게 여기려 한다.

선생은 이 절개를 끝까지 지키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후손들에게도 조선 왕조 벼슬은 하지 말 것과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 것을 남겼다. 하지만 훗날 후손 가운데 조선 왕조 벼슬에 오른 이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한다. 관찰사·이조판서를 지낸 흔적이 기록으로 남아있으니 말이다.

고려 충신들 가운데 선생과 같은 절개를 지키려 한 이들도 많았지만, 목숨을 유지하지 못했다 한다. 선생은 산골벽지에 들어온 덕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혹자는 조선이 그리 큰 해악은 되지 않겠다 싶어서, 혹은 충절의 본보기로 삼으려 그냥 뒀을 것이라는 추측도 한다.

   

선생 후손들은 600년 넘게 지금까지 빈집으로 두지 않고 자리 지키고 있다. 선생이 세상과 등지기 위해 담장을 쌓았다 하여 '담안마을'이라 불리기도 한다.

고려동학표비·고려동 담장·고려종택·자미단·밭 3000여 평·자미정·율간정·복정이 수백 년 이어졌으나, 한국전쟁 때 잔당을 없애려는 국군에 의해 소실되었다가 복원됐다. '자미단'은 백일홍 핀 곳에 단을 만들었다 하여 이름 지어졌는데, 선생이 주로 시간을 보내던 곳이었다 한다.

고택 안채 뒤에는 '복정'이라 이름 지어진 우물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는 선생의 손자 부부 효행 얘기가 깃들여 있다. 병져 누운 어머니가 전복을 먹고 싶다 하였지만, 산속에서 구할 길은 없었다. 대신 천지신명께 기도하니, 이 우물에서 전복이 나왔다 한다. 전복을 앞에 둔 어머니는 귀한 음식이니 함께 먹자고 했지만, 효심 깊은 며느리는 거짓으로 '먹을 줄 모른다'고 했단다. 어머니 병은 말끔히 나았지만, 며느리는 선한 거짓말에 대한 죄책감으로 마음 무겁게 한평생 지냈다고 전해진다.

오늘날 고려동 유적지를 찾으면 이오 선생이 만든 작은 고려국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여기 사람들은 '대한민국'보다는 '고려'라는 말이 더 익숙하다.

위치: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 580(문암초등학교 지나 장내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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