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자협회 ‘안중근 루트’ 연수 참가기
(상)하얼빈에서 외친 ‘코레아우라’
2014년 연 안중근 의사 기념관
‘위국헌신 군인본분’ 글귀 눈길
이토 히로부미 겨눈 장소 복원
유리창 너머로 의거 현장 관람
차로 10여 분 거리 자오린공원
묻어달라 유언 이뤄지지 않고
유묵 ‘청초당’ 새겨진 비석만이
한국기자협회가 올해 광복 80주년을 맞아 ‘안중근 의사의 외침, 그 현장을 가다’라는 주제로 특별연수를 마련했다. 올해는 안중근(1879∼1910) 의사의 하얼빈 의거 116주년이자 순국 115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10월 22일부터 27일까지 5박 6일 일정으로 중국 하얼빈을 시작으로 러시아 연해주, 간도, 단둥(단동)을 잇는 여정을 따라갔다. 이 지역은 일제강점기 국외 항일투쟁 핵심 거점이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하고, 1910년 강제 병합(경술국치)으로 국권을 빼앗아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이 일대에서 항일투쟁을 벌였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들의 발자취를 몇 걸음이나마 되짚어보며 항일투쟁 역사와 독립의 의미를 다시 새길 수 있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중국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가 대한제국 주권 침탈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겨냥해 방아쇠를 당기고 나서 외친 말은 “코레아 우라”였다. 러시아말로 ‘대한제국 만세’라는 뜻이다. 이토는 안 의사가 쏜 총알 세 발을 맞고 쓰러져 30분 뒤 숨졌다.
탐방 첫날, 항일투쟁사에서 상징적 장소인 하얼빈역에서 여정이 시작됐다. 애초 의거일에 맞춰 방문할 계획이었지만, 최근 연길공항 임시 폐쇄로 일정이 변경됐다.
1907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안 의사는 이토의 만주 방문 소식을 듣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하얼빈으로 향했다. 이번 탐방은 그 경로를 거슬러 올라갔다.
역사를 뒤흔든 총성
하얼빈역 광장을 지나 역사 안으로 들어가면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있다. 2014년 하얼빈 의거 105주년을 맞아 문을 열었다.
입구에 들어서니 안 의사 전신상이 방문객을 맞는다. 오른손에 모자를 움켜쥐고, 왼손을 뻗어 앞으로 나아가려는 듯한 31세 청년 모습이다. 그 위로 이토를 저격한 시각, 오전 9시 30분에 맞춰진 시계가 걸려 있다.
전신상 옆 벽면에는 안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쓴 유묵 복사본 몇 점이 걸려 있다. 유묵마다 안 의사를 상징하는 왼손 무명지(약지) 단지 손도장이 찍혀 있다.
안 의사는 거사에 앞서 1909년 2월 러시아 크라스키노(옛 연추) 한 마을에서 동지 11명과 단지동맹을 결의했다. ‘동의단지회’를 결성한 12명의 독립투사는 왼손 무명지 첫마디를 끊어 혈서로 태극기에 ‘大韓獨立(대한독립)’ 네 글자를 써 항일투쟁 의지를 다졌다. 이후 안 의사는 모든 친필 유묵에 ‘단지 손도장’을 남겼다. 안 의사가 남긴 수많은 유묵 가운데 31점이 국가지정문화유산(보물)으로 지정돼 있다.
기념관에서 가장 눈에 띈 글귀는 ‘爲國獻身 軍人本分(위국헌신 군인본분)’이다. 1910년 3월 26일 사형집행일,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 의사가 마지막으로 그동안 자신을 지성으로 돌봐준 일본인 간수 치바 도시치에게 써준 글이다. 치바는 전쟁이 끝나고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도 안 의사 유묵과 영정을 집안에 모시며 평생 추도했다고 한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라는 이 글귀는 지난해 12.3 내란을 겪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묵직한 울림을 준다. 원본 유묵은 현재 서울 남산 안중근기념관에 소장돼 있다.
기념관 내부로 쭉 들어가면 유리창 너머로 의거 현장인 1번 플랫폼을 볼 수 있다. 바닥에는 안 의사와 이토가 서 있었던 위치가 각각 ‘세모’와 ‘네모’로 표시돼 있다.
동행한 현지가이드로부터 “한-중 관계에 따라 플랫폼 표시 청소 상태가 달라진다”는 ‘웃픈’ 설명을 들으며 뿌연 창문 밖을 자세히 내다봤다.
두 사람의 거리는 약 7m, 열 걸음도 채 안 되는 거리다. 거사 직전까지 이토 얼굴을 몰랐던 안 의사는 직감적으로 ‘늙은 도둑’을 겨눴다고 진술했다. 당시 러시아 영화기사가 촬영했다는 저격 영상은 일본인에게 팔린 뒤 사라졌다.
기념관에는 의거 당시 사용된 권총과 총알 모형·신문 기사 사진·재판 기록 등을 비롯해 안 의사 생애가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중국어와 한글이 병기돼 있다. 중국과 러시아 등 각국 주요 지도자들이 안 의사를 추모한 글도 소개돼 있다. 중국 5.4운동 지도자이자 공산당 창시자인 진독수는 ‘나는 청년들이 톨스토이와 타고르가 되기보다 콜럼버스와 안중근이 되기를 원한다’고 남겼다.
116년 동안 실현되지 못한 유언
하얼빈역에서 차로 약 10여 분 거리에 있는 ‘자오린 공원’(옛 하얼빈공원)으로 향했다. 중국 항일운동가 리자오린(이조린)의 유해가 안장되면서 지금은 ‘자오린 공원’으로 불리지만, 안 의사가 묻히고자 한 곳이기도 하다.
안 의사는 사형 집행을 앞두고 1910년 3월 10일 뤼순감옥에서 면회 온 동생들에게 “내가 죽은 뒤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에 묻어뒀다가,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유언은 아직 이뤄지지 못했다. 일본은 안 의사가 순국한 뒤 유해 매장지를 철저히 숨겼다. 안 의사 묘소가 독립운동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해서다. 광복 이후 수십 년 동안 국내외에서 유해를 찾으려는 시도가 이어졌지만 성과가 없었다.
지금 이곳에는 안 의사의 유묵 ‘靑草塘(청초당)’이 새겨진 비석만이 세워져 있다. ‘풀이 푸르게 돋은 둑’이라는 뜻으로, 봄에 풀이 푸르게 돋아나듯 조국 독립도 곧 다가올 것이라는 염원을 담은 글이다. 국가지정문화유산인 유묵 원본은 현재 창원시 진해구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안 의사는 의거 전 이 공원에서 계획을 점검하고, 남문 밖 사진관에서 우덕순·유동하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관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위치에는 옛 건물은 사라지고 현대식 상가가 들어서 있다.
이번 연수에서는 안 의사가 옥중투쟁을 벌이며 순국한 뤼순감옥은 방문하지 못했다.
안 의사는 재판 과정에서 이토를 쏜 15가지 이유를 조목조목 열거했다. 모두 여섯 차례 공판을 받은 안 의사는 공판에서 의거 성격을 당당히 밝힌다.
“내가 이토를 죽인 것은 한국독립전쟁의 한 부분이요, 내가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도 전쟁에서 패배해 포로가 된 때문이다.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요, 대한의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행한 것이니, 만국공법에 의해 처리하도록 하라.”
1910년 2월 14일 마지막 공판에서 안 의사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사형이 확정된 이후 안 의사는 옥중에서 자서전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을 집필한다. 응칠은 안 의사 어릴 적 이름이다.
안 의사는 항소를 포기하고 <동양평화론>을 마무리할 때까지 사형 집행을 연기해달라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동양평화론>은 미완성 유고로 남았다. 1910년 3월 26일 사형집행일, 이날 뤼순에는 추적추적 봄비가 내렸다고 한다.
탐방단은 뤼순감옥을 가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하얼빈에서 중국과 러시아 국경도시 쑤이펀허(수분하)로 가는 야간 열차에 올랐다. /정봉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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