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들 며칠씩 준비해 벌인 용왕맞이굿 등 굿판
모두 모여 마을 안녕 빌고 덕담 '끈끈한 연결'
무당-주민 교류 전통 '영등' 덕에 단절 없이 이어와
19세기부터 보존된 문서함 속 자료, 역사적 가치

8일 오후 통영항여객선터미널을 떠난 지 한 시간 정도 지나자 멀리 한산면 죽도가 보인다. 무녀의 눈빛이 진지해진다. 굿패는 여객선 위에서부터 연주를 시작한다. 배가 천천히 마을로 들어선다. 선착장 주변 곳곳에 황토가 뿌려져 있다. 부정을 막는다는 의미다. 무녀가 배에서 내려 마을 어귀에 수호신이 머무른다는 서낭목과 돌장승, 거리신 비석이 있는 곳을 차례로 찾는다. 마지막으로 장승에게 인사를 올린 그는 의례를 위한 옷을 덧입는다. 마을회관 부엌에선 음식을 준비하던 할매들도 잠시 손을 놓는다. 2년마다 열리는 100년 전통의 죽도마을 별신굿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배에서 내린 굿패가 매구를 치며 마을로 들어선다. /백솔빈 기자
배에서 내린 굿패가 매구를 치며 마을로 들어선다. /백솔빈 기자
굿패가 돌장승에게 인사를 올리고 있다. /백솔빈 기자
굿패가 돌장승에게 인사를 올리고 있다. /백솔빈 기자

◇조심하고 또 조심하던 시절 = 경주 정씨 집성촌인 죽도마을에는 현재 38명이 살고 있다. 남자 17명에 여자 21명인데, 대부분 70~80대 노인이다. 이번 별신굿을 위해 분주하게 음식을 준비하고 굿판을 지켜보는 할매들은 모두 80대였다. 이 중 김성자(80)·천달순(85)·곽길자(82)·김순자(83) 할매에게 옛 별신굿 이야기를 들었다.

옛날에는 임신하거나 임신 가능성이 있는 이들은 굿이 열리는 동안 섬 안에 있으면 안 됐다고 한다. 배를 타고 나가 친정이나 다른 동네로 가 있어야 했다. 이는 ‘해막(解幕)’이라는 전통이다. 원래 해막은 마을 제의 때 출산에 따른 ‘피 부정(不淨)’을 막고자 마을신 영역 바깥에 임신부를 위해 마련하는 오두막 같은 임시 거처를 말한다. 조상과 마을신을 모시는 주민들에게 귀신이 싫어하는 피를 보는 건 무서운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새끼를 밴 암캐나 암소도 섬 밖으로 옮겼다.

음력 초사흗날 굿 하는 날짜를 받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굿이 열리기 전까지 대략 보름간 기도를 올릴 사람을 정했다. 지난 3년 동안 상을 치른 적이 없고, 아이도 안 낳은 집이 대상이었다. 이를 제관집 또는 제주라고 한다. 보통 부부가 같이 움직였다. 제주로 뽑힌 부부가 매일 저녁 당산에서 밤새워 기도를 올렸다. 기도하기 전엔 목욕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제주가 집 밖으로 나오거나 산에서 내려올 때는 사람들과 마주쳐 부정을 타지 않도록 종을 쳐서 알렸다. 굿이 끝난 후에도 제주는 6개월간 소고기를 먹지 않고, 싸움에 휘말리지 않도록 행동을 조심해야 했다. 죽도마을에서는 7~8년 전까지만 해도 제주를 뽑았다고 한다.

골메기굿을 하며 동네를 돌고 있는 굿패와 무당. /백솔빈 기자
골메기굿을 하며 동네를 돌고 있는 굿패와 무당. /백솔빈 기자
우물 앞에서 골메기굿을 하고 난 다음, 젯밥이 놓여져 있다. /백솔빈 기자
우물 앞에서 골메기굿을 하고 난 다음, 젯밥이 놓여져 있다. /백솔빈 기자

이렇게 과거 죽도마을 사람들은 굿이 열리기 전부터 많은 공을 들였다. 굿은 마을회관 앞을 지나다니지 못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참여하던 마을 제의였다. 지금은 규모가 반으로 줄고, 옛날만큼 활기가 없다고 할매들은 입을 모은다. 하지만, 여전히 그대로인 건 있다. 남해안별신굿 특유의 반주 그리고 무녀의 구성진 사설과 소리다. “무당들이 지금도 물 흐르듯 참 잘한다. 내가 시집왔을 때랑 똑같다.” 남해안별신굿보존회가 옛 방식을 지켜온 노력이 빛나는 부분이다.

◇정성스러운 손길로 분주하게 = 첫날에는 혼자 사시는 김순선(80) 할매 댁에서 묵었다. 할매는 오랜만에 말 상대를 만난 듯 손이 건조해 자꾸 갈라진다는 이야기, 아들네 사는 이야기 등을 풀어놓았다. 세상을 떠난 친척을 떠올리며 그리워하기도 했다. 할매는 지난 며칠간 거리 밥상(좌우 밥상)을 미리 준비했다. 거리 밥상은 자식이 나이 든 부모에게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바치는 것으로 본굿이 열리는 둘째 날 본당에 차려진다. 올해는 떠난 이들의 사진 앞에 넋을 기리는 마음으로 상을 차렸다.

이날 할매는 오전 6시부터 밥상에 올릴 음식을 정성스레 정리했다. 할매가 분주하는 동안 무당과 악사들도 바쁘게 움직인다. 당산에서 일월성신굿을 마치고 내려와 골메기굿을 시작한다. 골메기굿은 동네를 누비며 마을 수호신에게 젯밥을 바치는 순서다. 굿패는 민물이 나는 방죽(방중못)과 우물에도 들른다. 섬인 죽도마을에서 식수와 관련된 우물과 방죽은 특히 귀하다. 죽도마을 방죽은 자연적으로 생겨난 곳인데, 당산 할머니 오줌이 고인 것이라거나 그가 목욕하던 곳이란 설이 있다. 이는 당산 할머니 덕분에 민물이 났다는 믿음에서 나온 이야기다.

죽도마을 김순선(80) 할매가 거리 밥상(좌우 밥상)에 올릴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백솔빈 기자
죽도마을 김순선(80) 할매가 거리 밥상(좌우 밥상)에 올릴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백솔빈 기자
본당에 차려진 거리 밥상. 원래는 자식이 나이든 부모에게 바치는 상이지만, 이젠 죽은 이들의 넋을 기리는 의미로 차려지고 있다. 사진 속 대부분은 세상을 떠났다. /백솔빈 기자
본당에 차려진 거리 밥상. 원래는 자식이 나이든 부모에게 바치는 상이지만, 이젠 죽은 이들의 넋을 기리는 의미로 차려지고 있다. 사진 속 대부분은 세상을 떠났다. /백솔빈 기자
마을 어르신들이 용왕맞이굿에 올릴 작은 상을 차리고 있다. /백솔빈 기자
마을 어르신들이 용왕맞이굿에 올릴 작은 상을 차리고 있다. /백솔빈 기자
무녀가 용왕맞이굿을 진행 중이다. /백솔빈 기자
무녀가 용왕맞이굿을 진행 중이다. /백솔빈 기자

“용왕상 차린 분들은 가지고 나오시길 바랍니다.” 무녀가 바다 앞에 다다르자, 마을 안내 방송이 울린다. 이제 용왕맞이굿을 할 차례다. 할매들이 곳곳에서 작은 상을 차려 나온다. 바다 일을 하는 사람들은 예측 불가능한 바다에서 목숨을 잃기도 한다. 때로 시신을 못 찾는 경우도 생긴다. 용왕맞이굿은 무속인과 마을 주민들이 바다에서 죽은 사람을 함께 기리는 합동 제사다. 내륙 지역 마을 굿에는 없는 바다 마을 별신굿만의 특징이다.

이후 본당에서 이어지는 지동굿도 의미가 크다. 이는 마을을 태동시킨 조상을 모시고, 주민들 행복을 비는 의례다. 지동궤(마을 문서함)를 연 다음, 대모가 큰절을 올리며 굿이 시작된다. 죽도마을 지동궤는 19세기부터 오늘날까지 100여 년간 보존·전승되고 있다. 통제사가 마을에 발급한 문서(1805년), 암행어사가 발행한 문서(1854년) 등이 들어있다. 굿 관련 수입 지출 장부인 위신부(1924년)도 남아 있다. 또, 굿을 할 때 바치는 돈인 상전(상돈)을 그해 누가 얼마나 바쳤는지도 기록해 지동궤에 보관한다. 이날 별신굿을 참관한 허모영 동아대학교 사학과 박사는 “지동궤에 보관된 죽도마을 기록물은 기록문화유산과 무형문화유산 별신굿이 접점을 이루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믿음과 기억으로 이어지는 = 죽도마을 별신굿은 통영에서 유일하게 한 번도 끊이지 않고 이어진 마을굿이다. 그 배경엔 ‘영등’이란 전통이 있다. 무당이 한 해에 네 번 정도 마을에 들르는 것을 ‘영등 간다’라고 표현한다. 무당은 마을 사람들과 친밀감을 쌓으면서 그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파악한다. 죽도마을에는 남해안별신굿 정씨무계를 계승한 세습무들이 꾸준히 영등을 다녔다. 이들은 아기를 낳는 집에서 산파 역할을 하기도 하고, 아픈 사람이 있으면 수지침도 놔줬다. 중요한 행사를 열 땐 길일을 짚어 날짜를 잡아 줬다. 이런 노력 덕분에 마을 공동체와 무당 간 신뢰가 두텁다.

마을 어르신이 무당에게 상전(상돈)을 바치며 인사하고 있다. /백솔빈 기자
마을 어르신이 무당에게 상전(상돈)을 바치며 인사하고 있다. /백솔빈 기자
마을 어르신이 무당에게 상전(상돈)을 바치며 인사하고 있다. /백솔빈 기자
마을 어르신이 무당에게 상전(상돈)을 바치며 인사하고 있다. /백솔빈 기자
끝으로 굿패가 배를 타고 나가 상에 차려졌던 재물을 바다에 바치고 있다. /백솔빈 기자
끝으로 굿패가 배를 타고 나가 상에 차려졌던 재물을 바다에 바치고 있다. /백솔빈 기자

죽도마을별신굿보존회 회장직은 한 집안이 3대에 걸쳐 맡고 있다. 정지홍 회장은 집안 어른들이 늘 굿을 보존해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그는 굿이 마을 단합에 좋다고 배웠다. 또, 굿을 믿으면 좋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굿 안에 배워야 할 덕목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그는 1959년 태풍 '사라'가 닥쳤을 때, 죽도 마을에서 사망자가 없었던 것도 굿 덕분이라고 믿는다. 정 회장은 “지금까지 별신굿이 계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마을신을 숭배하는 믿음”이라고 설명했다. 굿이 열리는 동안 이런 마을 사람들의 믿음이 엿보였다. 특히, 몸이 성하지 않은 마을 어르신들이 무당에게 손을 합장하고 고개를 숙일 때다. 무당은 어르신의 눈을 끝까지 바라보며 좋은 말을 건넨다. 그러면 어르신은 편한 표정을 지으며 미소를 지었다.

정영만(68) 남해안별신굿보존회 예능보유자이자 대사산이(굿을 전반적으로 관장하고 악사와 무녀를 길러내는 이)는 전통을 보존하는 방법은 바로 이 현장성에 있다고 말했다. 그는 무당이 하는 일이란 마을 사람들을 기억해 주는 것이라 말한다. 그 기억이 바로 정신이자 전통이 된다. 죽도마을 별신굿이 여전히 사람들의 삶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이유다.

/백솔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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