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생 90명 중 57명 함께 이름 올려
"민주항쟁 때마다 학생들 움직여
대통령 자리 중요성 뼈저리게 느껴"
경남지역 고등학생들이 윤석열 대통령 탄핵과 처벌을 촉구하는 시국 선언을 했다. 앞으로 청소년과 학생, 학부모 등 지역 교육공동체로 시국 선언이 확산할지 주목된다.
산청 간디고등학교 학생 1~3학년 9명은 6일 오전 경남교육청 본청 로비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우리는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과 법적 처벌을 요구합니다'라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단기 방학인 가정학습 기간 중이어서 참석자는 9명이었지만, 함께 이름을 올린 학생은 전교생 90명 가운데 모두 57명이다.
2학년 김여영 학생(학생회 부회장)은 지난 3일 밤 잠들었다가 친구 전화를 받고 깨어나 비상계엄 뉴스를 보게 됐다. 단체대화방도 난리가 난 상태였다.
"제발 계엄 해제 요구안이 가결되기를 바라면서 국회 상황을 지켜봤어요. 보고 나서도 잠이 오지 않더라고요."
그동안 윤석열 정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며 김여영 학생은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채 상병의 죽음을 보면서 아직도 이 나라는 안전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진상 규명 하나 제대로 해주지 못하는구나 싶었고요. 왜 독립기념관장에 친일파 뉴라이트 논란이 있는 인물을 앉히는지, 왜 독도는 계속 빼먹고 역사 왜곡을 하는지, 여성가족부는 왜 폐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보수 정당이 집권하면서 소수자 인권도 후퇴하고 있어 답답하고 화도 났습니다. 고교생이 그린 '윤석열차' 만화 논란을 보면서는 학생이면 정치적 의사 표시도 못 하는 사회인가 느꼈어요."
대학에서도 시국 선언이 잇따르고 있는데, 고교생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민주항쟁에서 학생들이 정말 큰 공을 세웠고, 그 때문에 죽음도 당했어요. 많은 청소년이 앞으로 투표를 잘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을 듯해요."
같은 학년 권동현 학생은 기후위기 대응책이 후퇴하는 것을 보면서 무력함을 느끼고 있었다.
"서울에서 열린 환경시위에 참여하고 플라스틱 협약 지지 서명 참여 등 다양한 활동을 해왔지만, 대한민국이 오늘의 화석상 1위로 수상하거나 탄소배출 줄이기 목표도 현 대통령 임기 이후로 늦춘다는 안 좋은 소식을 접하면 접할수록 제 지위로 뭘 할 수 없어 착잡하던 시기였는데, 비상계엄 사태가 터졌어요."
권동현 학생은 함께 행동에 나서야 하는 이유를 말했다.
"기후와 환경을 생각해도 그렇고 미래 우리의 기본권이 침해당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간디학교가 입시 경쟁과 과도한 스트레스를 막고자 생겨났는데, 다른 학교들도 입시 위주 교육을 벗어나 진정한 교육의 재미를 느꼈으면 해요. 학생들이 참된 사회를 만드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어른들도 학교도 사회도 변화했으면 합니다."
이번 시국 선언은 1학년 이주연 학생이 학생회에 처음 제안했다. 학교장도 '간디고는 정치적 의사 표현을 자유롭게 하고 그것을 막지 않는 학교'이기에 이를 지지했다. 이주연 학생 또한 뉴스를 보면서 고민이 많아졌다.
"우리가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고등학생들도 시국 선언을 하자고 마음을 모아 시작하게 됐어요."
이날 기자회견에서 2학년 안현정 학생은 3학년 조현수 학생의 시 '용산의 봄은 오지 않는다'를 대신 낭독했다. 참석한 학생들은 '6~8세부터 촛불집회에 참석한 세대'라며 자신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들은 시국선언문에서 "작년 겨울 친구들과 보던 <서울의 봄>이 기억난다. 결말을 알면서도 희망을 품고 지켜보게 되었던 그 영화가 꿈에 나올까 잠을 못 이루던 밤이, 무능한 대통령 때문에 다시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지는 않을까 상상하던 날이 머지않아 진짜가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며 "지금까지 계엄령이 선포되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 역사를 배우고 기억하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는 또다시 독재 정권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두려움과 분노에 잠 못 이루는 밤을 가져다주었다"고 밝혔다.
이어 이들은 "윤석열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며 독재에 저항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한 수많은 국민을 '빨갱이'로 몰아 고문하고, 죽이고, 폭력을 일삼았던 끔찍한 역사를 되풀이하고자 했다"며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기까지 있었던 민주항쟁을 배우고 기억하는, 그 노력 덕에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아갈 수 있는 우리 청소년은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을, 비상계엄령 선포를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이들은 "우리는 투표권도 없이 지켜보기만 해야 했던 지난 대선을 기억한다"며 "우리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깨달았다"고 밝혔다.
끝으로 이들은 전국 청소년과 중고교생의 시국 선언 동참을 호소했다.
간디고 학생들은 2016년 국정농단 사건이 불거졌을 당시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는 학생회 차원 시국선언문을 발표했으며, 2013년 국정원의 대선 개입을 규탄하는 시국선언 대열에도 합류한 바 있다.
한편 이날 경남교육청이 교육의 정치적 중립 등을 이유로 브리핑룸 사용을 허락하지 않자 학생들과 교육·시민단체 관계자들은 학생 활동조차 막는 데 아쉬움을 나타냈다.
/이동욱 기자
다음은 간디고 3학년 조현수 학생의 시
※박노해 시인의 '오늘은 선거 날' 일부를 참고해 썼음
용산의 봄은 오지 않는다
서울의 봄을 너무 심취해서 본건가
술에 취한 건 아닐까
거부권을 그렇게 많이 쓰더니
대통령 할 수 있는 거 다 해보고 싶나 보다
민주주의 무서운 줄 모르고
손에 왕 짜 그리더니
그 오만함에 우리는 45년 전
악몽의 시대로 돌아갔다
시민들은 혹독한 겨울 추위
떨림을 짓누르며 민주주의를 지켰다
계엄군이 국회에서 후퇴할 때 이름 없는
한 계엄군이 떨리는 눈빛으로
사죄하며 지나갔다
총구를 겨누는 쪽
총구에 겨눠지는 쪽
모두 떨고 있었다
계엄 해제 전
길고도 길었던
그 시간 동안
이 나라는 떨고 있었다
민주주의는 떨고 있었다
우리는 떨고 있었다
비상계엄 선포 해제 발표
대통령은 사죄하지 않았다
그에겐 한치의 떨림도 없었다
이제 누가 떨려야 할 차례인가?
더 이상 민주주의가
더 이상 희망이
더 이상 우리가
떨려선 안 된다
촛불은 계속해서
꺼질 듯 떨리지만
꺼지지 않는다
우리의 촛불이 꺼지지 않는 한
용산의 봄은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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