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6개월간 이어진 불법파견 소송에
창원공장 해고 노동자들 일상 무너져
"생활비 떨어져 가계 대출만 5000만 원"

뒤늦게 불법파견 인정돼..."꿈 같은 순간"
"포기하고 살았던 것들 하나씩 되찾을 것"

쉽사리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 있습니다. 한국지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견딘 ‘3475일’이 그렇습니다. 회사에 직접 고용을 요구하며 해고까지 당해야 했던 이들은 끊임없이 투쟁했습니다. 회유와 협박에도 그저 버텼습니다. 무한히 이어질 것 같았던 이 굴곡의 터널도 어느새 끝이 보입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던 희망이라는 끈도 마침내 손에 쥔 듯합니다. 25일 하루 한국지엠 창원공장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동행하며 지난한 시간의 뒷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잠이 안 오데예.”

해가 채 뜨기도 전인 25일 오전 5시 30분 창원스포츠파크 만남의 광장, 한국지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모였다. 괜히 긴장돼 잠에 쉽게 들지 못했다고 한다. 이날은 9년 넘게 끌어왔던 불법파견 소송 마침표를 찍는 날이다. 법원은 어떤 판결을 내놓을까. 초조한 마음을 실은 전세버스가 서울 서초동 대법원으로 향했다.

대법원 2호 법정에 다닥다닥 붙어 앉은 비정규직 노동자 수십 명은 초조한 얼굴로 선고를 기다렸다. 손으로 얼굴을 감싸기도, 기도하듯 가만히 눈을 감은 이들도 있었다.

“주문 상고를 모두 기각한다.”

대법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작은 환호가 새어 나왔다. 몇몇은 의자 아래로 양 주먹을 쥐어 보였다. 앉은 상태에서 서로 껴안은 이들도 있었다.

(왼쪽부터)노지영·조연재·심재영 한국지엠 창원공장 비정규직지회 조합원이 25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투쟁을 외치고 있다. /박신 기자
(왼쪽부터)노지영·조연재·심재영 한국지엠 창원공장 비정규직지회 조합원이 25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투쟁을 외치고 있다. /박신 기자

◇“고생했다” 네 글자에 담긴 진심 = 조연재(43·창원) 씨는 선고가 끝나자마자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승소 사실을 알리자 휴대전화 너머에서는 “고생했어”라는 답이 돌아왔다. 조 씨는 울음을 참으며 이따 집에서 보자면서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저나 아내나 서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니까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네 글자밖에 안 되는 단어에 얼마나 많은 것이 담겨 있는지 저희는 알지요. 지금까지 제가 해왔던 투쟁들, 아내가 홀로 일하러 가야 했던 순간들이 다 스치더라고요.”

전업주부던 조 씨 아내는 그가 불법파견 투쟁을 벌이던 2015년부터 제조업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주 6일을 하루 10~12시간씩 일했다. 특근이 없는 날에는 주방에서 아르바이트도 병행했다. 10년 가까이 고강도 노동을 이어온 아내 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아내까지 생계에 뛰어들었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했다. 조 씨 가정은 그가 2018년 1월 31일 해고된 이후 빚만 늘어갔다. 초등학생이던 두 자녀를 키우기에는 돈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생활비가 부족할 때 조금씩 빌린 돈이 어느새 4000만~5000만 원까지 불어났습니다. 처음에는 투쟁팀 활동에만 전념했었는데, 도저히 생활이 안 돼 생업에 나설 수밖에 없었어요. 그때는 아내와도 금전적인 문제로 많이 싸웠지요.”

조 씨는 해고 이후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는 숱한 포기 가운데 아이들과의 시간을 포기해야 했던 순간이 가장 마음 아팠다고 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누구 집은 캠핑 다녀왔다’면서 우리도 가자고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지요. 저는 해고가 됐고 아내는 주말 하루 쉬는 데 캠핑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아빠 역할을 제대로 못 해 줘서 그 점은 지금도 미안해요.”

조 씨는 선고 직후 조합원들과 오랜만에 술을 나눠 마셨다. 해고 이후로는 술자리도 잘 나가지 않던 그였다.

“솔직히 아내는 술 안 먹고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거든요. 근데 그런 날 있잖아요. 술 한 잔 안 하면 도저히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그런 날. 저한테는 오늘이 그랬어요. 누가 알아주는 거 아니라도 스스로한테 고생했다고 보상해주고 싶었어요.”

한국지엠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과 연대자들이 25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박신 기자
한국지엠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과 연대자들이 25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박신 기자

◇“당당하게 한국지엠 다닌다고 말하고 싶어요” = 심재영(53) 씨는 입사 23년 차가 되는 해에 해고됐다. 2019년 12월 31일 한국지엠 정규직을 꿈꿨던 그의 목표도 물거품이 됐다. 그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오로지 투쟁과 소송뿐이었다.

“한국지엠 사내 하청에 다닐 때는 어디 가서 한국지엠 다닌다고 말하기가 좀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정규직이냐고 물어볼 것 같았거든요. 근데 정규직 전환은커녕 해고됐다는 사실에 앞길이 막막했지요.”

심 씨 역시 투쟁하는 데만 1년 6개월을 썼지만, 생계를 이유로 생업에 뛰어들었다. 하루하루 버거운 것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랬던 그에게 아내는 유일한 내 편이었다.

“아내가 미용실을 했는데, 경제적으로도 많은 도움이 됐어요. 제가 투쟁팀에서 활동할 때도 저를 지지해줬고 제가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할 때마다 응원해줬어요. 절대 못 잊지요.”

대다수가 넉넉히 승소를 예상했던 재판이었지만, 심 씨는 혹시 모를 불안감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생산 지원 업무를 맡았던 까닭에 불법파견으로 인정받지 못할까 봐 걱정됐다.

“저도 승소를 예상하기는 했지만, 직접 선고를 듣기 전까지는 계속 불안했어요. 한국지엠이라는 단어가 이내 나왔고 모두 기각됐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안도했던 것 같습니다. 꿈 같은 순간이었지요.”

심 씨는 정규직으로 전환되면 아들과 함께 일할 수 있다며 기뻐했다. 심 씨 아들은 지난 1월 한국지엠 창원공장 생산직으로 입사했다.

“공장에 있는 동료가 ‘이제 곧 아들하고 같이 일할 수 있겠네’라면서 축하해주더라고요. 제가 소주 한 잔 산다고 했어요. 저는 정규직을 상징하는 하얀 명찰 달아보는 게 꿈이었거든요. 비정규직은 명찰도 없어요. 양반과 머슴 같은 관계였지요.”

한국지엠 창원공장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이 25일 오전 대법원 선고를 앞두고 서울 서초동 대법원 정문으로 모이고 있다. /박신 기자
한국지엠 창원공장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이 25일 오전 대법원 선고를 앞두고 서울 서초동 대법원 정문으로 모이고 있다. /박신 기자

◇“이제 못 해봤던 거 실컷 해야지요” = 노지영(41) 씨는 2019년 12월 31일 해고 이후 오롯이 투쟁에만 전념했다. 투쟁 지원금으로 나오는 100만 원 남짓한 돈으로 생계를 일궜다. 그는 그나마 부모님 집에서 지낼 수 있어 상황이 나은 편이라고 말했다.

“옷도 거의 안 샀고, 술자리도 6개월에 한 번 갈까 말까였지요. 포기할 건 포기해야 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생활 자체가 안 되니까요. 부모님 집에 살면서 눈치도 많이 봤습니다.”

그는 투쟁팀에서 활동하면서 서울·인천·강원 등 전국 곳곳에 다니며 한국지엠 투쟁 현황을 알렸다. 하루에 10시간 넘게 차를 타고 이동하는 일은 기본이고 1박 2일 노숙도 잦았다. 결국 몸에 무리가 왔다.

“일할 때 몸이 안 좋거나 한 적은 없었는데, 투쟁하다 보니 어느 순간 허리가 망가져 있더라고요. 지난해 5월부터는 투쟁팀 활동도 더는 하지 못했어요. 모아둔 돈으로 생활했는데, 한 달에 20만 원, 30만 원 가지고 살았지요.”

그는 정규직으로 채용이 되면 미뤄놨던 것들을 하나씩 할 생각이라고 했다. 그중에는 결혼도 포함돼 있다.

“해고됐을 때는 결혼은 꿈도 못 꿨지요. 돈을 못 버는 데 여자는 어디서 어떻게 만나겠습니까. 지금은 더 늦기 전에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창원으로 돌아가는 전세버스 안 한국지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곤히 잠들었다. 그동안 꾸지 못했던 단꿈을 꾸면서….

/박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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