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문학관 가는 길] ④ 하동 이병주문학관
한국 근현대사 기록해 주목
2008년 고향에 업적 망라해 개관
매년 창작 캠프, 행사 열려
1965년 마흔넷에 소설 집필 시작
27년간 80여 권 '쓰는 삶' 몰두
말년에 이승만, 전두환 칭송도
얼룩진 "올바른 역사 기록자"
지역마다 문학관이나 작가 생가 또는 기념비가 한두 곳은 있다. 대부분 지역 출신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를 조명하고 널리 알리기 위함이다. 하지만 문학 기념물이 있어도 찾는 발걸음이 없고, 무관심하다면 건립하고 기록하는 의미가 있을까. 지난 시대 작가들은 한국사회의 현실과 인간의 삶을 어떻게 담아냈는지 지역 곳곳에 있는 생가, 시비, 문학관 등 문학 기념물을 톺아보고자 한다.
소설가 이병주(1921~1992). 누구지,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한 시대를 휩쓸었던 작가지만, 작가를 얼핏이라도 기억하는 건 50대 이상의 연령층이겠다.
하동 출신 이병주는 문학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를 기록한 작가다. 1965년 마흔넷에 중편 <알렉산드리아>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소설을 썼다. 이후 1968년 〈관부연락선〉 등 여러 신문에 소설을 연재했고 우리나라 사회·역사를 배경으로 한 〈지리산〉, 〈산하〉 등 장편소설로 주목을 받았다. 박경리가 대하소설 〈토지〉 연재를 시작할 1969년 무렵이었다. 가요계에서는 남인수가 '애수의 소야곡'을 들고 나왔고 나훈아가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들고 나왔다. 이병주는 당시 문단에서 박경리와 더불어 근현대사를 기록, 재구성한 장편소설을 쓰는 작가로서 주목을 받았고 대중적으로 각광을 받았다.
찾는 이 없어 안타까움 가득
이병주는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에서 태어났다. 지금 북천면은 꽃축제와 경전선 기차가 지나는 마을로 잘 알려져 있다. 이 곳에 2008년 5월 19일 개관한 이병주문학관이 있다. 문학관에서는 작가의 문학적 업적을 알리고 문학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해마다 여름 창작캠프, 영·호남학술제, 이병주하동국제문학제 등 다양한 행사를 하고 있다.
문학관은 사천시 곤양면으로 넘어가는 이명산 초입에 있다. 북천면 소재지에서 1005번 지방도로로 접어들어 5~7분쯤 가면 왼쪽 길가에 이정표가 나타난다. 면 소재지와 가까운 곳인데도 찾기 힘들고 외진 곳이었다. 이번 취재에는 하해영·전혜진 씨가 동행했다. 산청도서관 동아리모임인 '손바닥글쓰기' 회원인 이들은 요즘 '매일 5문장 글쓰기'를 하면서 삶과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는 참이다. 40대의 이들은 작가 이병주를 알지도 그의 소설을 읽은 적 없으나 이번 기회에 알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 일행이 방문한 날, 햇빛은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따가웠다. 건물 지붕은 박공 양식이다. 전체 건물은 좌우 날개를 세운 듯 펼쳐져 있다. 정원 한편 향나무를 배경으로 이병주 상반신 동상이 있고 또 다른 편에는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동상이 있다. 정원을 가로질러 전시실 입구 계단을 향하다 보면 양쪽 기둥이 펜대와 펜촉 모양이다.
문학관은 전시실과 강당 및 창작실을 갖추고 있다. 좌는 전시실, 우는 강당이다. 전시실에는 연대기별로 작가의 문학 작품과 유품을 전시해 두고 있다. 방명록을 작성하고 전시실로 들어서니 먼저 입구 한가운데 천장까지 세워둔 커다란 만년필 모형이 눈에 들어온다. 전시실을 압도할 만한 이미지다. 만년필 위를 올려보다가 천장에서 쏟아지는 햇빛을 봤다. 뾰족한 천장이 사선으로 내려오는 양옆에 작은 유리창을 낸 천장이다. 낮에는 햇빛이 들어오고, 밤에는 달빛 별빛이 들어오리라. 건축가는 이 문학관을 지을 때 이병주의 어록 중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 말을 공간 가득히 담고 싶었던 걸까.
전시실은 밖에서 보기와는 달리 내부 전체가 원형으로 되어있다. 빙 둘러 이병주의 삶과 문학세계를 네 시기로 나눠 전시하고 있는데, 시대순으로 작품을 짚어볼 수 있다. 전시실 한가운데는 대표작 〈지리산〉 7권의 한 장면을 시각적으로 재현한 모형이 펼쳐져 있다. 눈 덮인 세석평전에서 110명의 남부군이 1만 명의 군인을 상대로 대치하고 있는 장면이다. 거기에다 한쪽에는 작가의 집필 모습도 재현해 두고 있다.
그는 쓰고 또 쓰는 사람이었다
이병주는 1940년께 일본 유학을 갔고, 해방 후 1946년부터 1949년 진주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그 후 교수, 언론인으로 생활했다. 그리고 비록 낙마했지만 30대에 두 번이나 국회의원 선거에 나갔다. 1961년 마흔에는 필화사건으로 2년 7개월을 복역하고…. 이병주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여건에 성향도 활달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거기에다 1960년대 중반 자동차가 귀하던 그 시절 이미 외제 자동차를 타고 다닐 정도였다니 이병주를 따라다니는 '부르주아 자산계급'이라는 꼬리표가 그냥 나온 것은 아닌 듯하다. 〈관부연락선〉 주인공인 유태림은 이병주 자신의 한쪽일지도.
널리 알려진 일화가 있다. 이병주는 시인 김수영과 동갑내기다. 김수영이 만취 상태로 귀가하다가 버스 사고로 사망한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그날 술자리에 같이했던 이 중 이병주가 있었다고 한다. 여럿이 같이 술을 마신 뒤 집으로 돌아갈 때 이병주가 김수영에게 집까지 태워주겠다고 하자 김수영이 "너 같은 부르주아 차에는 안 탄다"고 거절한 뒤 귀가하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다. 그날 순순히 이병주의 차를 타고 갔더라면 김수영은 어찌 됐을까. 세상 참 얄궂다. 그런데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술자리를 같이할 정도면 얼추 친한 사이일 텐데, 그날따라 언쟁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평소에도 서로 갈구는 사이였을까.
이병주가 작가로서 대단하게 느껴진 건 무엇보다 그가 쓴 원고량이다. 1992년 사망할 때까지 27년 동안 80여 권을 썼다는데, 한 달에 쓴 원고 분량이 평균 1000매였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호방해서 술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이였지만, 사실은 한쪽에서 온갖 자료를 찾아 확인하고 오랜 시간 원고지 앞에 앉아 있었던 사람이었던 걸까. 가늠하기가 힘들다. 분명한 건 이병주는 쓰고 또 쓰는 사람이었다는 것.
다양한 평가들
내가 이병주의 소설을 처음 읽은 게 언제였던가, 기억이 아슴푸레하다. 확실한 건 〈관부연락선〉을 먼저 읽었고 〈지리산〉을 읽었다. 읽는 재미가 있어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역사의 재구성이니 시대적 고증, 현대사 기록물이니 등은 훨씬 나중에 따져본 것이고, 당시는 딱히 뭐라 특정할 수 없는데 희한하게 재미있었다.
다른 독자들은 어떻게 읽었을까. 문득 누리소통망(SNS)에 이병주가 어떤 소설가인지, 작품이 어땠는지 묻는 게시물을 올렸다. 황주호(산청군) 씨는 '대단히 해박한 작가, 스케일이 큰 작가, 재미있게 읽히는 소설을 쓰는 작가'라고 말했다. 장용성(진주) 씨는 '역사의 재구성. 역사 격동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을 서사화'한 작가라고 말했다. 그가 남긴 허물은 지적하는 독자도 있었다. 김주완(창원) 씨는 "현대사를 다룬 소설들 나름 재밌게 읽었는데, 말년에 이승만과 전두환을 칭송하는 책 〈우리의 역사를 위한 변명 : 대통령들의 초상〉(1991)을 써서 완전 실망"했다고 말했다. 작고 한 해 전에 나온 책이다. 스스로 '역사의 올바른 기록자'가 되려 한 작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7월 무더위 속 골짝 문학관 정원은 가끔 검은 실잠자리가 날아다니고, 벙어리뻐꾸기가 울며 고즈넉하다. 전시실을 나와 정원을 기웃대다가 문학관 앞 여러 개의 바위마다 이병주의 소설 속 어록을 적어놓은 게 눈에 띈다. 수풀 우거진 정원 옆 시비에는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는 어록이 적혀있다. 그가 지향하던 문학은 이제 햇빛에 바래고 있었다.
/권영란 지역 스토리텔링 전문가·작가
지역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했으며 〈시장으로 여행가자〉, 〈남강 오백리 물길여행〉, 〈경상의 말들〉을 차례로 출간했다. 〈남강 오백리 물길여행〉으로 제1회 한국지역출판대상을 받았다. 2016년부터 한겨레신문에 서울·수도권이 아닌 지역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쓰고 있으며, 지역 기록과 경남 토박이말 채록 작업을 궁리 중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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