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문학관 가는 길] ③ 산청 산천재와 남명 묘소
61세 자리 잡은 시천면 사리
삶 흔적 곳곳 담겨 유적지 같아
곽재우 등 수많은 제자도 길러내
선생 한시 '덕산복거' 읽으니
천왕봉 자연 사랑 절절하고
벼슬 거부한 신념에도 감탄
지역마다 문학관이나 작가 생가 또는 기념비가 한두 곳은 있다. 대부분 지역 출신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를 조명하고 널리 알리기 위함이다. 하지만 문학 기념물이 있어도 찾는 발걸음이 없고, 무관심하다면 건립하고 기록하는 의미가 있을까. 지난 시대 작가들은 한국사회의 현실과 인간의 삶을 어떻게 담아냈는지 지역 곳곳에 있는 생가, 시비, 문학관 등 문학 기념물을 톺아보고자 한다.
마을이 '남명 문학관'이고 '남명 유적지'다. 산청군 시천면 사리. 남명 조식(南冥 曺植·1501~1572)이 예순하나에 터를 잡은 곳이다. 이곳에는 남명이 학문을 닦으며 제자를 길러냈던 산천재가 있다. 마을 뒷산에는 선생이 묻힌 묘소가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남명 기념관, 한국선비문화연구원이 있고 이웃 원리에는 남명 사후 제자들이 세운 덕천서원과 세심정이 있다.
남명 조식은 조선의 선비이다. 경과 의를 실천한 학자이면서 문장가이고 뛰어난 교육자기도 하다. 남명의 업적 중 무엇보다 높이 평가하는 것은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정인홍, 곽재우 등 의병장으로 나섰던 이들이 대부분 그의 제자들이다. 남명의 삶과 학문은 오래 전부터 많은 이들이 연구해 왔고 지금도 연구가 활발하다.
미리 밝히지만, 남명이 말년을 보낸 이곳 사리에 문학관이라 할 만한 건물이 있는 건 아니다. 마을 곳곳에 있는 남명의 문장과 시비, 주련을 더듬더듬 읽으며 1561년 지리산 아래 은거한 선비 남명의 잠시 삶을 엿볼 뿐이다.
덕천강을 끼고 덕산(德山)에 들다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20번 국도는 드나드는 차량 없이 한적했다. 20번 국도는 의령군에서 지리산 아래 중산리까지 이어진다. 지리산이 가까워질수록 사방이 녹음방초다. 그 아래 지리산에서 발원한 덕천강 맑은 물길이 크고 작은 산자락을 돌아 돌아 흐른다. 20번 국도에서 살짝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 모롱이를 돌자마자 눈앞에 떡하니 지리산이 자리 잡는다. 그리고 살짝 비켜선 듯 멀리 천왕봉이 우뚝하다.
시천면 소재지 사리마을. 지리산에 닿기 전 산골 마을인데 골짜기가 실처럼 길고 가늘다 하여 '실골'이라 하다가 그 후 한자로 표기하면서 사리(絲里)가 되었다. 하지만 사리보다 이웃한 원리와 함께 이 일대는 '덕산(德山)'으로 통한다. 20번 도로를 달려오면서 무심코 지나쳤겠지만, 시천면 입구에는 수백 년 전부터 '입덕문'이라는 각자 바위가 있다. 남명 또한 어느 한시에서 덕산동으로 드는 사람은 모두 입덕문을 거쳐 들어간다고 말한 적 있다.
6월 볕살이 유난히 뜨거운데 산천재를 찾은 한 무리의 탐방객들과 마주쳤다. 물어보니 이곳 한국선비문화연구원으로 1박2일 연수 온 울산남구청 공무원들이었다.
덕산복거(德山卜居)와 산천재
남명의 한시 중에 '덕산복거(德山卜居)'가 있다. 덕산에 터를 잡고 그 심정을 쓴 시다. 지금 산천재 네 기둥에 붙어있는 칠언절구의 주련이 그것이다.
"春山底處無芳草(춘산저처무방초)/ 只愛天王近帝居(지애천왕근제거)/ 白手歸來何物食(백수귀래하물사)/ 銀河十里喫有餘(은하십리끽유여)"
최석기 전 경상국립대학교 교수의 <남명과 지리산>에서 해석을 가져왔다.
"봄산 어느 곳엔들 향기로운 풀이 없겠는가마는/ 천왕봉이 상재(上宰) 있는 곳에 가까운 걸 좋아하네/ 맨손으로 왔으니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은하 같은 저 십 리 물 아무리 마셔도 오히려 남으리."
남명이 예순하나에 이곳 덕산동에 거처를 잡은 것은 오로지 상재와 가까이 있는 천왕봉을 사랑한 까닭이리라. 지리산과 천왕봉을 10번 넘게 유람했다는 남명다운 글이다. 세 번째 네 번째 절구는 남명의 곤궁한 삶과 재치를 엿볼 수 있는 구절이다. 백수(白手)로 와서 먹고 살 일을 걱정하는 듯하다가 배고프면 은하 십 리 물이나 마시자고 읊었다. 여기서 은하 십 리는 산천재 앞으로 흐르는 지리산 물길 덕천강을 말한다. 애달프다. 500년 흘러 많은 사람들이 선생을 추앙하고 있으나, 벼슬을 거부하고 학문에 정진하며 평생 처사를 자처하던 남명이 이곳에 터를 잡기는 했지만 '먹고 사는 일'이 어찌 쉽기만 했을까 싶다.
마루 벽면에도 작은 편액이 있다. 남명이 덕산에 터를 잡은 후 덕천강 가 작은 정자에 내걸었던 '제덕산계정(題德山溪亭)'이 적혀 있다.
"請看千石鐘(청간천석종)/ 非大扣無聲(비대구무성)/ 爭似頭流山(쟁사두류산) /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
뜻은 이렇다.
"청컨대 천 석 들이 종을 보시게/ 북채 크지 않으면 쳐도 소리 없다네/ 나도 어찌하면 저 두류산(지리산)처럼 될까/ 하늘이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않는다."
남명의 수양정신과 기개를 엿볼 수 있는 오언절구 한편이다. 예순하나에 들어온 지리산 아래 덕산에서 남명은 어떤 꿈을 꾸고 있었는지 감히 짐작하기 어렵다.
남명매와 오언절구 '우음(偶吟)'
산천재 문을 들어서면 본채가 있고 뒤란으로 돌아가는 곳에 작은 건물이 있는데, '조식 남명문집 목판(曺植 南冥文集 木板)'을 보관하던 곳이다. 선생의 시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책판으로 선조 37년(1604) 제자 정인홍에 의해 해인사에서 간행되었으나 불에 타버려 광해군 14년(1622) 다시 간행하였다 한다. 그런데 동재는 있으나 서재는 없다. 지리산과 천왕봉이 있는 방향에 서재 건물을 올리지 않고 단지 매화나무 한 그루 하늘을 이고 있다. 텅 빈 뜨락이다. 지리산과 천왕봉을 가리지 않고 어느 때고 서성대며 천왕봉을 바라보기 위함이다. 지리산과 천왕봉을 사랑한 남명은 날마다 이곳 산천재에서 천왕봉과 벗하며 봄·여름·가을·겨울을 보냈으리라.
앞뜰 매화나무 한 그루는 남명이 이곳 산천재에 거하면서 뜰에 심었다고 해 남명매로 불리며 정당매, 원당매와 더불어 이곳 산청지역 삼당매 중 하나다. 겨울 지나 우수 무렵 매화꽃이 피면 이 또한 장관이다. 산천재 앞마당에서 수백 년 된 매화나무가 꽃을 피워대니 천 리 밖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든다. 매화나무 아래는 남명의 한시 '우음(偶吟)' 한 수가 쓰여있다.
"朱點小梅下(주점소매하)/ 高聲讀帝堯(고성독제요)/ 窓明星斗近(창명성두근)/ 江闊水雲遙(강활수운요)"
남명이 우연히 읊은 이 오언절구의 뜻은 다음과 같다.
"작은 매화 아래서 책에 붉은 점 찍다가/ 큰 소리로 요전(堯傳)을 읽는다/ 북두성이 낮아지니 창이 밝고/ 강물 넓은데 아련히 구름 떠 있네"
남명은 새벽이 밝아오는 시간까지 밤을 새워 요전을 읽었다. 책에 붉은 점을 찍은 것은 중요한 글자나 기억할 내용에 표시를 한 것으로 요즘으로 치면 밑줄긋기라 하겠다.
덕산 어디에선들 지리산과 천왕봉이 바로 눈앞에 있건만 이곳 산천재 뜰 매화나무 옆에 서면 가장 잘 보이는 듯하다. 매화꽃 피는 맑은 봄날, 이곳에서 천왕봉을 바라보는 것도 좋겠지만 흰 눈에 덮인 천왕봉은 이루 말할 수 없겠다.
산천재, 바로잡을 세 가지 사실이 있다
김경수 한국선비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박사)은 산천재를 두고 우리나라 최고 명문사립대학이라고 말했다. 임진왜란 7년 동안 전국 의병장으로 나선 이들 중 50여 명이 남명의 제자였으니 선생만큼 후학을 양성한 위대한 스승이 어디 있겠느냐며 그 산실이 산천재라고 강조했다.
김 연구원은 잘못 알려진 게 있다며 몇 가지 사실을 일러줬다. 첫 번째는 산천재가 원래 지금 위치에 있었던 게 아니라는 것이다. 김 연구원은 "산천재는 현 남명기념관 동쪽 돌담 뒤에 있었다. 옛 자리에 여재실이 들어서는 바람에 1818년 복원하면서 지금 자리에 세운 것이다. 원래 이 자리에 작은 정자가 있었다"고 말했다. 앞서 말한 '제덕산계정주(題德山溪亭柱)' 오언절구 한시가 걸렸던 그 정자였을까, 미뤄 짐작해본다.
두 번째는 그렇다면 산천재 앞뜰 매화나무가 400년이 넘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흔히들 이곳이 산천재이고 매화나무 또한 그 당시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것과는 다르다. 남명매는 이곳에 산천재를 복원 후 심은 것이라면 200년이 좀 넘은 것으로 짐작된다.
세 번째 사실은 '우음'이 이곳 산천재에서 지은 시가 아니라 김해 살던 시절 산해정에서 지은 것이라 했다. 첫 구절 "작은 매화나무 아래서 책을 읽다가는 남명매 아래가 아니라 방 안의 매화분일 것"이라 말했다. 그러고보니 동이 틀 때까지 책을 읽는데 밖일 수는 없겠다.
산천재를 돌아 마을 뒷산 남명 묘소에 올랐다. 갑작스레 더위가 닥친 날이라 땀은 쏟아지고 걸음이 무거웠다. 400m쯤 되는 비탈진 숲길을 올라 묘소에 닿으니, 선생은 고즈넉하니 자리 잡은 채 말이 없었다. 어디선가 벙어리뻐꾸기가 울고 천왕봉은 녹음방초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아도 가까이 있고 그 어떤 것에도 울지 않는, 선생이 사랑한 지리산이 거기 있다.
/ 권영란 지역 스토리텔링 전문가(작가)
지역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했으며 <시장으로 여행가자>, <남강 오백리 물길여행>, <경상의 말들>을 차례로 출간했다. <남강 오백리 물길여행>으로 제1회 한국지역출판대상을 받았다. 2016년부터 한겨레신문에 서울·수도권이 아닌 지역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쓰고 있으며, 지역 기록과 경남 토박이말 채록 작업을 궁리 중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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