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너리댁의 밥상> 친정 가는 날

“우찌 그리 내 보러 안 오네”
명이 투정에 그저 “미안타”

어매 집 보이니 눈물 질끔
동생 얼굴 보니 또 울컥해

방바닥 ‘뜨끈’ 상차림 ‘푸짐‘
살가운 언니 대접 엄마 같다
십 년 묶은 얘기에 쉴 새 없고
하나둘 떠나가니 더 애틋해져

내가 우리 딸들의 친정이 되면서부터 나의 친정은 점점 흐려졌다. 넉넉한 친정은 되지 못하더라도 딸들 속 안 썩이게 그리고 언제든 엄마 손이 필요하면 달려가려고 애쓰다 보니 내 친정은 자연스럽게 없어졌다. 그리고 이 나이에 친정 타령하는 것도 남 부끄러워서 항상 '무소식이 희소식이겠거니.' 생각하며 살았더니 잔너리에 안 간지도 십 년이 거의 넘었다.

그런데 뜻밖에 윤지가 이모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한다. 이참에 나도 안부를 물을 겸 잔너리에 사는 동생에게 전화하니 '언니 우찌 그리 내를 보러 한 번을 안 오네.'라고 투정을 늘어놓았다.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를 대기엔 이 나이에 무슨 일을 하겠나 싶고 너무 멀어서라기엔 우리 동네 방천길 따라 걷다 다리 하나만 건너면 되는 것을 지도 알고 나도 아니, 그저 '아이고 명아 미안타.'라고 하는 수밖에. 전화 속이 동생의 성화와 전화 밖에서 내를 부추기는 윤지 덕에 엉겁결에 열이튿날에 동생집을 가기로 했다.

아무리 내가 늙고 볼품이 없어도 친정을 갈 때 그냥 갈 수 있는가. 군청에서 준 버스카드와 목욕 카드를 챙겨 오전 11시 30분에 오는 버스를 타고 전도에 있는 목욕탕에 갔다. 때수건을 야무지게 손에 끼워 평소보다 더 힘껏 문지르고 윤지가 백화점에 가서 샀다고 해서 아껴 쓰던 바디워시도 두 번 짜서 온몸을 씻고 나오니 조금은 하얘진 것 같아 퍽 만족스럽다. 거기다 지난주에 창원 놀러 갔을 때 막내가 백화점에서 사준 옷도 입고 나니 친정 가는 면이 좀 서는 것 같다.

모처럼 만난 자매의 얼굴이 환하다. 왼쪽이 동생, 오른쪽이 언니다.  /김윤지
모처럼 만난 자매의 얼굴이 환하다. 왼쪽이 동생, 오른쪽이 언니다.  /김윤지

주차장에서 기다리겠다던 윤지 차를 타고 오랜만에 잔너리에 간다. 목욕을 막 마치고 나와 빨개진 뺨을 식히려고 창문을 열고 있으니 윤지 차가 합진교를 지나 너른 들판이 사이로 들어선다. 길 끝, 마을의 시작점에 낡은 기와가 올려진 어매 집이 보인다. 기억 속 잊고 있던 어매의 하얀 저고리가 생각나서 눈물이 찔끔 나 애꿎은 바람을 탓하며 창문을 올리고 차에서 내린다. 윤지가 보면 내를 또 놀릴까 싶어 윤지를 내버려두고 뒤뚱뒤뚱 잰걸음으로 어매 집 뒤에 있는 동생집으로 올라갔다. 마당에 들어서기도 전 골목길에 내 동생 명이가 서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동생에게 말을 전하려는 순간, 마당에 있던 꼬리마저 통통한 개가 어찌나 짖어대던지 어쩔 수 없이 집 안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현관문을 열면서 사나운 개를 나무라긴 했지만, 마당에서 본 동생의 얼굴이 너무 늙어있어서 또 울컥할 뻔한 걸 개가 짖는 바람에 눈물이 쏙 들어가 속으로는 그 통통한 개에게 고마웠다.

매번 우리 집에 손님 온다고 하면 보일러를 뜨뜻하게 켜놓고 상에 음식을 차려둔 적은 많아도 내가 손님이 되어서 이렇게 받은 적은 처음인 것 같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니 아까까지 앉아 있던 목욕탕 온탕보다 더 뜨끈한 바닥이 있었다. 게다가 제부가 들고 온 상에는 새알 팥죽, 미역국, 3색 나물, 찌짐 여러 가지가 있었다. 괜히 내가 온다고 해서 명이가 고생한 거 아닌가 미안하기도 하면서 내가 이제 어디 가서 이런 대접을 받겠나 싶어 참 고마웠다. 명이는 이렇게 진수성찬을 차려놓고도 '윤지야 고기반찬이 하나도 없제? 내가 바빠서 장에 못 갔다 와서 그렇다. 미안타.'라고 한다.

이렇게 차려놓고도 미안하다고 하는 명이를 보니 다시 어매 생각이 났다. 음력 3월 스무날에서 4월 열흘쯤에 어린 도성이를 데리고 친정에 가면 우리 어매가 하던 말이 그거였다. '도성아, 묵을 게 없제? 할매가 미안타.'

언니를 위해 동생이 차린 한 상. /김윤지
언니를 위해 동생이 차린 한 상. /김윤지

언제나 어린 줄만 알았던 명이가 저런 말도 한다. 어디 가서 이런, 소리하면 웃을 테지만 내 눈에는 명이가 80이 넘어도 아직도 단발머리 아기일 때가 눈에 선하다. 어매랑 큰오빠 세상 베리고 나서 이제 최씨 집안 큰 어른은 나니까 내가 우리 동생들의 친정이자 엄마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보니 우리 명이가 내 엄마 노릇도 한다.

기특한 마음으로 새알 팥죽을 떠먹고 미역국도 한 그릇 뚝딱하고 나니 명이가 언니야 커피 타 줄게라고 한다. 커피는 무슨 커피라고 말하기도 전에 윤지가 옆에서 할무니들 모시고 맛있는 커피집 가려고 했는데 집에서 커피 마시면 안 되지예 라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못 이기는 척 윤지 차 뒷자리에 앉아서 북천면에 있는 커피집까지 가는 동안 십 년 묵은 근황 얘기를 털어놓으니, 입이 쉴 새가 없다. 옆 마을 누구는 요양병원에 들어갔고 또 다른 누구는 세상 베맀다는 이야기뿐이다. 하나 둘 떠나간다고 생각하니 옆에 있는 내 동생이 더욱 애틋해졌다. 생각해 보니 명이네 집이 뭐가 그렇게 먼 곳이라고 저승 가면 아예 건너가지도 못하는데 이승에서 이러나 싶다. 그러니 앞으로는 내 친정 잔너리에 자주 가야겠다. 이제 내가 친정 자주 드나든다고 뭐라 할 시댁 식구도 없으니 말이다.

재연이 언니에게.

언니야, 윤지가 아래 주말에 데리고 간 커피집 앞에 있던 밀밭 기억나나? 한 마지기 땅에 심어진 아직 여물지 않은 퍼런 밀밭을 보니까 우리 애맀을 때가 생각나더라. 우리 어매가 보리는 노랗게 익어야 먹을 수 있다고 해서 다 같이 보리밭 앞에 앉아서 제발 햇볕이 세게 내리쬐어서 얼른 퍼런 보리 노랗게 익게 해 달라고 빌었잖아. 그리고 그 보리타작하고 나면 남는 건 갈아서 언니가 보리 개떡 만들어줬던 것도 기억나더라. 우리 식구 엄마 아부지 다 하면 10명인데 개떡은 몇 개 안 되니까 다 나눠주고 언니는 끄트머리 몇 입 먹고 말았던 것도 지금 생각하니까 참 사무치더라고. 그런데 그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배 곯던 시절도 끝나고 이제 우리는 이렇게 늙고 뭐든 양껏 먹을 수 있는 시절을 보내고 있네.

그래도 가끔은 그 시절이 그립다. 언니가 일찍 시집을 가서 우리가 기와집에서 같이 산 날이 얼마 없잖아. 가끔 도성이 현성이 보러 내가 놀러는 갔어도 우리가 그때는 사는 게 참 바빠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못 했으니까 말이지.

내가 전화로는 언니가 내 보러 안 와서 서운하다 했지만, 언니가 안 온 이유는 나도 잘 알고 있다. 언니가 남들보다 마음이 참 여리고 정이 많아서 아직도 어매 생각하면 운다이가. 그러니까 어매 집 뒤에 있는 내 집에도 오기가 어려웠제? 그래도 언니, 어매 생각에 슬프더라도 우리 집에 자주 와줘. 우리 영감이 우리 나이에는 뭐든 원 없이 해야 한다고 하더라. 나는 내 세상 베리기 전까지는 언니 얼굴도 자주 보고 싶고 언니랑 젊었을 때 못 한 이야기도 많이 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어매가 차려주던 밥만큼은 아니더라도 다음엔 언니 온다고 하면 전도장에 가서 언니가 좋아하는 가자미도 사고 소고깃국도 끓여줄게. 우리 못 먹고, 살 때 언니 먹을 것도 덜 먹으면서 우리 챙긴 거 생각하면 언니한테는 밥 만 그릇을 줘도 안 아깝다. 그러니까 다음에도 꼭 우리 집에 와서 나랑 놀자.

셋째 동생 명이가.

/김윤지 하동군청 근무

(※ 필자소개 얼떨결에 담담하고 소박한 이야기를 쓰게 되었지만 속은 아주 기름지답니다. 간혹 글에 누런 기름이 뜨더라도 페이퍼타월처럼 저를 감싸주시고 닦아주시길 바랍니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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