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 없어도 스스로 뭉치는 시민, 내란부터 남태령 넘어 조선소로
승리 경험을 자산으로 삼은 약자들 이미 새로운 사회 만들고 있어
공존이 생존, 다시 연대 그리고 전환. 지난 3년 경남도민일보가 내세운 의제입니다. 해마다 내세운 가치가 실현되는 현장을 찾고 사람을 만났습니다. 지난한 시도는 지난해 불법 계엄 앞에서 한순간 좌절합니다. 12.3 내란은 주권자를 겁박하고 모욕했습니다. 하지만, 이 도발에 맞서는 주권자는 광장에서 연대하고 공존하며 극적인 전환점을 만들었습니다. 의제 안에서 막연하던 가치가 현실에서 구현됐습니다. 가늠할 수 없는 동력은 남태령에서 폭발합니다.
전주환(55·진주 금곡면) 씨는 2024년 12월 21일 낮 12시 서울과 경기 경계인 남태령에서 고립된 상황을 받아들였다. 트랙터를 몰고 진주에서 출발한 지 5일째 되는 날이었다. 밀려드는 추위와 공포를 자유발언으로 버텼다. 경찰차벽과 경찰에게 갇힌 농민은 100여 명이었다. 익숙한 좌절을 떠올리던 전 씨 앞에 오후 4시를 넘어 낯선 시민이 다가왔다.
◇선동 없는 연대 = "조금씩 나타나던 사람들이 오후 6~7시를 지나면서 확실히 늘었습니다. 특히 젊은 여성들이 많았습니다."
전 씨는 먼저 와 줘서 고맙다고 거듭 외쳤다. 추위에 농민들이 고립되는 것을 지켜만 볼 수 없어서 왔다는 답이 돌아왔다. 전 씨는 순간 울컥했다.
정영현 금속노조 경남지부 법규국장은 지난해 12월 3일 밤 국회 근처에서 밥을 먹다가 비상계엄 소식을 접했다.
"비상계엄을 해제하려면 우리가 국회로 가야 되겠구나 싶었지요. 가면서도 사람이 얼마나 모였을까 걱정했습니다."
도착하니 이미 많은 시민이 한목소리로 '계엄 해제'를 외치고 있었다. 가는 길에 쌓였던 두려움을 구호와 함께 떨쳐냈다.
정 국장에게 연대는 선동과 정교한 조직이 짜낸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계엄이 해제된 새벽까지 연대는 어떤 과정이 낳은 결과물이 아니라 시작부터 끝 그 자체였다.
지난해 12월 14일 창원광장에서 탄핵소추안 국회 가결 소식을 기다린 안윤서(14) 학생을 연대로 이끈 주체도 자신이다.
"탄핵안이 부결되는 것을 보고 결심했어요. 친구들에게도 같이 가자고 제안했습니다."
일주일 뒤인 21일 같은 장소에서 구호를 외친 정가람(25) 씨. 중국 유학 중인 그를 누구도 어수선한 국내로 불러들이지 않았다.
"중국에서 비상계엄 소식을 들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 너무 무력했어요. 외국에서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었습니다."
◇승리를 경험하는 약자들 = 스스로 결정해서 연대한 시민은 자기표현을 주저하지 않았다. 전주환 씨는 남태령 밤샘 집회 내내 끊이지 않던 자유발언을 기억했다. 이어지는 이야기 속 그들은 또 다른 약자였다.
"성소수자, 청년, 여성, 노동자, 장애인 등이 나와 저마다 자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무도 야유하지 않고 박수를 보냈습니다."
소외와 외면에 익숙했던 시민은 농민 처지를 알지 못해 사과했고 자신이 겪은 설움을 토해냈다. 조롱과 패배에 익숙했지만 '가만히 있는 게 최악'이라는 것을 경험한 세대는 연대를 기다리지 않았다. 길을 튼 시민이 거듭 외친 구호는 '이겼다'였다.
국회 앞에서 정영현 국장은 능동적인 시민을 재발견했다.
"시민은 선동되기 좋은 수동적인 존재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그날 제가 본 시민은 반대였습니다. 누가 어떤 말을 해도 존중받고 박수받았습니다."
◇편견·세대 넘어선 공감 = 케이팝과 민중가요, 성인·대중가요가 섞여 '탄핵 플레이리스트'가 된다. 광장에서 집회를 축제로 만든 매개다. 탄핵 선곡표는 고정관념과 편견을 넘어서고 세대를 아우르는 현상이 됐다. 각자 결집을 과시하던 응원봉은 어두운 권력을 몰아내는 빛으로 뭉쳤다. 거침없는 연대는 거제 한화오션으로 이어졌다.
고태은(31) 씨는 민주 노조를 깨우는 소리 호각 활동가다. 그는 전국금속노동조합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농성 소식을 누리소통망에 공유했다.
"처음 투쟁 기금을 요청했을 때만 해도 그렇게 불붙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남태령 밤이 지나면서 폭발적으로 늘었습니다. 모금 전달과 응원을 넘어 왜 투쟁하는지, 왜 단식하는지까지 공유됐습니다."
창원광장에서 정가람 씨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소수자에게로 번지는 현상에 주목했다. 같은 곳에서 안윤서 학생도 말과 생각보다 몸이 먼저 나가는 공감과 연대를 경험했다.
◇다시 만들 세계 = 광장을 채운 열망은 다채롭고 낯설면서도 단순하고 익숙하다. 거대한 연대가 일상에서도 작동하는 세상, 더 나은 전환을 언제든지 합의할 줄 아는 세상, 그래서 공존하는 세상, 더는 부조리 앞에서 비겁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타인에게 귀 기울이고 자기 얘기를 할 줄 아는 시민은 이미 새로운 세계를 만나고 있다. 기꺼이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있다.
/이승환 박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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