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소 울타리로 남은 사람들] 하청 노동자 이야기
정규직보다 많았던 하청
임금·복지 등 차별받아
2000년대 노동조합 결성
구조조정 등 맞서 '투쟁'
엄혹한 현실 알리는 계기
조합원 적극 참여 필요해
밭이나 논을 가는 '겨리'라는 쟁기가 있다. 흙살이 두꺼운 평지 옥답은 보통 쟁기로 갈지만 땅심이 고르지 못한 거친 자드락밭이나 발이 푹푹 빠지는 구렁논은 이 겨리로 갈았다. 두 마리 소를 나란히 세우고 곧은 멍에를 얹어 함께 끌게 한 것이 겨리다. 한 마리가 끄는 호리보다 힘이 좋아 땅을 깊게 갈 수 있어 농사는 잘되었지만 두 마리 소를 함께 부리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겨리질을 하려면 자기 소와 세를 주고 빌린 소를 함께 부려 썼다. 논밭갈이가 끝날 동안 부리는 집에서 여물을 주고 외양간을 함께 썼다. 멍에를 같이 메고 일한 소들인데도 간혹 못된 주인들이 자기 소여물에는 보리등겨 한 바가지라도 더 넣었다. 외양간이 비좁다며 빌린 소는 마당에 매어 두기도 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기를 거치면서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조선소 노동자들도 권익이 향상되었다. 회사 입장에서는 임금이 오르고 복지 혜택으로 생산비가 늘어 마뜩잖은 일이었다. 거기에 더해 극심한 호·불황을 주기적으로 겪을 때마다 구조조정이란 명목으로 하던 손쉬운 정리해고가 어려워졌다. 활로를 모색하던 조선소들은 신입 정규직을 채용하지 않고 생산 공정 일부를 외주화해 하청업체에 맡겼다. 호황과 불황의 진폭이 커질수록 하청 업체 의존도가 높아져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원청 정규직보다 하청 노동자 수가 더 많아졌다. 그러나 그 손쉬운 선택은 끌어올린 생산 효율보다 차별이라는 더 큰 문제점을 만들었다. 본사가 진행하는 생산 공정 일부로 같은 공장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도 월급봉투 두께가 달랐다. 하청이라는 이유로 복지 혜택에 차별을 두었다. 임금이 체불되거나 해고가 되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사내 일상에서 아예 드러내놓고 하는 차별과 무시도 있었다. 옛날 한 정승이 길가 나무 아래서 쉬다가 겨리질하는 농부에게 어느 소가 일을 잘하느냐 물었다. 농부는 밭 가운데에 소를 세우고 나와 정승 귀에 어느 소가 낫다며 속삭였다. 듣게 말하면 섭섭한 소와 태만해진 소가 서로 마음이 상해 부리기 어려워진다는 옛이야기다. 옛 농부의 배려보다 못한 대놓고 하는 차별과 처우에 하청 노동자들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조선업에선 처음으로 2003년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가 만들어졌으나 조합원이 소속된 업체를 폐업하는 등 탄압으로 노조 활동을 위축시켰다. 이듬해 2월 현대중공업의 전산 말소로 인한 부당해고에 항거해 박일수 씨가 분신 사망했다. 이 사태를 방관하고 사측 편을 들었던 현대중공업 노조가 민주노총에서 제명되는 일로 하청 노조 활동이 많이 알려졌다. 이후 사내 하청지회는 2010년 원청이 하청 노동자의 노조법상 사용자에 해당한다는 취지의 대법원 판결을 받아냈다. 거제에서도 하청 노동조합을 꾸리자는 바람이 일어났다. 그 이야기를 들으러 거제 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이하 거통고조선하청지회)가 2023년 합의한 약속을 지키고 올해 교섭에 나서라 요구하는 농성장을 찾았다. 며칠 사이 가을을 건너뛴 찬 바람이 부는 노숙 농성장에는 밤이슬이라도 막아줄 천막조차 뺏기고 펼침막과 차량으로 바람막이를 하고 있었다. 회의를 마친 김형수 지회장에게 거통고조선하청지회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활동하는지 물었다.
2008년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조직위원회(이하 하노위)가 발족했다. 이듬해 하청노동조합을 준비하던 강병재 의장과 하노위 활동하던 노동자들이 업체 폐업에 고용승계를 하지 않는 방법으로 해고당했다. 2년 동안 해고 무효 투쟁하던 강 의장은 '대우조선해양의 탄압에 의해 해고된 비정규노동자가 살기 위해 또 죽기 위해 기어 오른다. 1987년 이전의 공돌이 공순이가 지금의 대우조선 비정규노동자로 보면 정확한 현실이다.'라는 글을 남기고 송전탑에 올라 고공 농성을 한다. 사측의 합의 불이행으로 두 번에 걸쳐 253일간 고공 농성은 희망버스까지 부르며 조선 하청 노동자 실상을 세상에 알렸다. 비록 하노위가 하청 노동조합으로 직접 연결되지는 못했지만 퍼스트 펭귄 역할을 하였다. 2015년 이후 조선업 위기로 보호막 없는 하청 노동자 대량 해고가 예상되자 거제에서 활동하던 시민, 노동단체와 당시 하노위와 현 하청지회 노동 활동가 중심으로 조선하청노동자살리기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가 만들어졌다. 이들은 구조조정이 진행될 때 그나마 노동조합 방패가 있는 대우조선해양 정규직 노동자보다 피해가 클 하청 노동자 구제 대책 마련에 주력했다. 대책위 활동에 동참하면서 현장에서는 뜻이 맞는 노동자들 모임과 토론이 활발해졌다. 이들 모임은 토론 결과 노동조합 설립으로 뜻을 모았다. 금속노조 경남지부와 함께 준비하고 대책위도 노동조합을 통해 대량 해고를 막아내자는데 동의했다. 하노위와 대책위 활동하는 노동자들이 탄압받는 우여곡절 끝에 2017년 2월 5일 150여 명 조합원으로 거통고하청지회로 노동조합 등록을 해냈다.
2019년 5월 10일 직영 정규직 노동조합 단체 교섭으로 합의한 하청 노동자 성과금을 지급하지 않아 촉발된 총궐기에 2000여 명 하청 노동자가 참여했다. 성과금이 지급되면서 떨어진 그 동력을 다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150여 명이 가입하면서 위상이 높아졌다. 2021년에는 산하 도장분회가 쟁의 조정 신청하여 조정 종료로 파업권을 확보하고 찬반투표를 거쳐 하청노동조합 최초로 합법 파업을 하였다.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 2022년 한여름 건조 중인 유조선 탱커 사방 1m 감옥에 51일간 스스로 가두었던 유최안 씨가 들고 있던 손팻말 문구는 세상에 하청 노동자의 실상을 알렸다. 일명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2·3조 개정안) 논의를 수면 위로 띄웠다. 그러나 그 대가는 혹독했다. 손배 소송과 형사 재판 진행은 일반 조합원들을 두려움으로 위축되게 하기에 충분했다. 조선 하청노동자에 대한 눈길은 모았으나 많은 조합원이 떠났다. 그들에겐 당당한 내일보다 오늘 먹을 수 있는 빵 한 조각이 더 절실했다. 검찰은 유 씨를 업무 방해 등으로 기소하여 징역 3년, 김형수 지회장에게는 4년 6개월을 구형했다. 조합원 20여 명에게도 징역형과 벌금을 구형했다. 470억 원 손해 배상 소송은 재판부가 사측에 실질 손실에 대한 자료를 제출하라 요구한 한 상태에서 변론 기일이 잡히지 않고 형사 재판 이후로 미뤄졌다. 동네 장정까지 동원해 소 코뚜레를 걸어 길들이려 하는데 머리 흔들며 투레질로 버티는 모습이 떠오른다.
엄혹한 상황에서도 하청지회 활동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회사와 정부는 조선하청노동자 차별, 원청노동자와 복지·임금 격차 등 한국 사회에 떠오른 조선업 원·하청 이중구조 문제를 상생 협의체를 통해 해소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2년이 지난 지금까지 별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김형수 지회장은 하청 노동자가 제대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노동조합이 되기 위한 동력원으로 많은 수의 조합원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적극적인 참여율이 더 앞서야 한다고 말한다. 엔진에서 실린더가 하나 추가될 때마다 마력은 몇 배나 늘어나지만 추가된 실린더가 폭발을 일으키지 못하면 노킹이 일어나 엔진이 멈추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비조합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뻔한 소리 아니냐는 듯 노동조합 가입하시라 말했다. 그간 차별과 격차로 조선하청 노동자들 하루하루가 눈 돌릴 틈 없이 힘들지만 오늘만 바라보지 말고 당당한 내일을 위해 쫄지 말고 나서기를 바랐다. 노동조합이 약한 자들에게는 얼마나 힘이 되고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느낄 것이라 했다.
겨릿소를 몰아 밭을 가는데도 고삐를 고루 잡지 않으면 고랑이 비뚤어진다. 더 많은 소출에만 눈이 멀어 보습을 깊게 박으며 채찍만 냅다 휘두르면 소가 쓰러지거나 쟁기가 부서진다. 조선소의 가장 짱짱한 울타리는 노동자다. 스스로 울을 허물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나.
깨어있는 시민의 단결된 힘이 바로 민주주의의 보루이자 우리의 미래라는 노무현 전 대통령 말을 표절한다.
"깨어있는 노동자의 단결된 힘이 노동조합의 보루이자 조선소의 미래가 아닐까."
/박보근 시민기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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