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복 쿠온출판사 대표와 번역가ㆍ일본 독자 30여 명 통영 방문
10년간 번역한 책 들고 묘소에 헌정…출판기념회 열고 의미 나눠
통영시 산양읍 박경리(1926~2008) 선생 묘소를 지긋한 중장년 20여 명이 에워쌌다. 이들은 모두 일본인이다. 손에는 일본어로 번역된 <토지> 20권을 한 권씩 들었다.
일본 도쿄 진보초 고서점 거리에서 쿠온출판사와 북카페 '책거리'를 운영하는 김승복(55) 대표가 <토지> 일본어 완역본 20권 출간을 기념해 번역가·일본인 독자 30여 명과 지난 19일 통영을 찾아 박경리 선생 묘소에 헌정했다.
쿠온출판사는 일본에서 한국 문학 전문 번역·출판을 하는 곳으로, 지난 10일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의 <채식주의자> 일본어판을 2010년 처음 낸 곳이기도 하다.
◇<토지> 일본 팬들과 함께 = 김 대표는 헌정식에서 "일본어판으로 1·2권을 동시에 발행해 2016년 선생님 묘소에 헌정하고, 그때 20권을 다 만들어 다시 오겠다고 약속드렸는데 8년 만에 그 약속을 지키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토지> 팬이자 한국을 좋아하는 일본 독자들과 같이 왔는데, 일본에 이런 사람이 정말 많다"면서 "그 속에서 한국 문학을 출판하고, 깊은 마음·감동을 나누는 좋은 사이"라고 소개했다.
일본 지바시에서 온 가지타 사토로(80) 씨는 "19권까지 읽었고 이전 책들은 2~3번씩 읽었다. 박경리 선생에게서 인생을 배웠다"면서 한국민요 '새타령'을 불러 추도했다. 또 다른 여성 독자는 "집이 좁아서 책을 사지는 못하고 도서관에서 빌려 18권까지 읽었다"며 "조선시대부터 3·4세대까지 다루고 있어 큰 공부가 됐다. 완간을 계기로 20권까지 독파하겠다"고 말했다.
◇25년간 쓴 <토지> 10년간 번역 = <토지>는 박경리 선생이 1969년 시작해 1994년까지 25년간 집필한 대하소설이다. 올해는 <토지> 완간 30돌 되는 해다.
이 방대한 소설을 일본어로 완역하기까지 10년이 걸렸다. 김 대표가 2014년 강원 원주시에 있는 토지문화재단과 일본어판 협의를 마치고 완역팀을 꾸리면서 대장정이 시작됐다.
번역은 한국 근대문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전문 번역가 요시카와 나기 씨와 기자 출신 한국문학 번역가 시미즈 지사코 씨가 한 권씩 나눠 맡았다. 편집은 1990년부터 한국 작가들과 교류해온 후지이 히사코 씨, 교정·교열은 재일교포 4세 박나리 씨가 참여했다. 감수는 재일교포 의사이며 청구학원 이사장인 김정출 씨가 담당했다.
김 대표는 "박 선생님이 소설 쓰실 때 하동은 물론 간도·도쿄 등을 직접 가본 적은 없다고 하셨는데, 일본어판 팀은 하동과 연변·블라디보스토크를 여행하기도 하며 긴 프로젝트에 대한 전의를 다졌다"고 설명했다.
◇경상도 말 번역은 어떻게 = <토지> 무대는 하동이고, 주요 등장인물은 경상도 말을 쓴다.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 표현을 빌리자면 '경상도 사투리는 적어도 <토지>에서는 표준어가 되고 있다'. 소설 속 등장인물 수만 600여 명 또는 800여 명이라고 의견이 분분할 정도인데, 이들이 쓰는 언어 역시 다양할 수밖에 없다.
이에 완역팀은 번역 원칙을 세웠다. 사투리는 표준어로 통일했다. 일본 독자에게 특정 일본 지역 사투리로 번역하면 왜곡된 이미지를 줄 수 있다고 판단해서다. 문법·문체는 현대적으로 간결하게 바꾸고, 인명은 가급적 한자 표기를 해 일본 독자들이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했다. 각 권에 별도로 책갈피를 만들어 주요 등장인물을 소개하고 주석과 역자 해설도 넣었다.
이날 오후 4시 거북선호텔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번역가들은 이러한 번역의 어려움을 털어놨다. 20권 중 11권을 번역한 요시카와 나기 씨는 "1권 번역이 죽을 만큼 힘들었다"면서 이후 근대 조선 농촌 정보와 인명·말투·지명 등에 대한 이해 등을 완역팀과 조율해 가면서 번역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반일문학? 일본에서 통할까 = 시미즈 지사코 씨는 <토지>가 '반일' 소설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번역 제안을 받고 고민했다고 말했다. 그때 토지학회장이던 최유찬 연세대 교수가 "토지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소설이다. 반일 소설로 읽는 건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라고 한 말에 용기를 얻어 번역에 도전했다고 했다.
편집인 후지이 히사코 씨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한국 근대사뿐 아니라 일본제국의 한반도 지배, 중일전쟁, 만주침략에 대해서도 다양하게 배울 수 있었다"면서 "일본 식민 치하에서 성장한 박 선생은 일본을 엄격히 비판하면서 친일파 존재, 시국 변화로 말미암은 배신 등 한국사회 내막까지 그려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소설은) 나라나 인종을 넘어 인간이 갖고 있는 보편적 사랑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현대사회에서도 중요한 메시지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20권까지 다 읽었다는 일본 독자 야마오카 미키로(73) 씨는 "1945년 8월 15일로 소설을 끝내며 그 의미에 대한 질문을 일본 사회에 던진 것"이라며 "일본 독자가 책임감 있게 그 질문에 답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완독했다는 오오츠카 게이코(56) 씨도 "〈토지〉는 많은 매력적인 등장인물을 통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지 알려줬고, 잊어서는 안 되는 한일 역사도 가르쳐줬다"며 "항상 곁에 두고 계속 읽을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 밖에 소설가 강영숙·강석경·공지영 등이 참석해 박경리 선생과 추억을 회고하고, 참석자들이 다같이 '아리랑'을 부르며 출판기념회를 마무리했다.
/정봉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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