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권이 망친 세상 (중)
30년 전과 다르지 않은 쌀 시세
껌 값도 안 되는 낮은 가격에 시름
"농민 생각 없는 공무원들 한심"
간호사가 의사 대신 처방·수술까지
의사 수 부족 탓 관행처럼 굳어져
불법 '만연' 알고도 외면하는 정부
윤석열 대통령이 양곡관리법과 간호법에 거부권을 행사하고 해를 넘겼다. 여전히 농민과 간호사들 상심이 깊다. 서로 겪는 어려움은 달라도 관통하는 지점은 같다. 무엇보다 대통령에게 외면당했다는 생각이 크다.
농민들은 나날이 오르는 생산비, 30년 전과 별반 차이가 없는 쌀값을 하소연한다. 간호사들은 의사가 떠넘긴 약 처방과 대리 수술이 불법으로 몰리는 상황을 구제해달라고 요구한다. 거부권 행사로 법안은 사라졌지만 문제는 고스란히 남은 지금도 대통령과 정부는 이를 방치하고 있다.
◇껌 값도 안 되는 밥 한 공기 값만 쳐줘도 = 함안군 산인면에서 30년 가까이 벼농사를 짓는 조병옥(54) 씨는 늘어나는 생산비와 줄어드는 소득에 허덕인다. 1997년 농사를 시작한 그는 3만 3057㎡ 규모 농지에서 1년에 13t씩 쌀을 수확한다. 생산비는 2000만 원 정도 들었다. 종잣값, 약값, 트랙터 임차료 등 비용이 만만치 않다. 전체 농지 중 30%는 유기농 쌀을 기른다. 정부에서 인정한 친환경 농자재를 쓰다 보니 지출 규모가 크다.
어렵사리 수확하더라도 거래 가격은 저렴하다. 쌀값 정체로 농산품 판매로 얻는 소득은 제자리걸음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3년산 산지 쌀값은 지난해 10월 5일 기준 한 포대(20㎏)에 5만 4388원이다. 지난달 25일 4만 9408원으로 떨어졌다.
“우리 농민은 80㎏ 정곡 기준 26만 원을 요구하고 있어요. 쌀 1㎏로 따지면 3250원, 밥 한 공기로 치면 325원, 껌 한 통 값도 안 돼요. 그게 우리가 바라는 소박한 요구예요. 지금은 80㎏ 정곡 기준 20만 2797원 수준인데 30년 전과 별반 다르지 않아요.”
전체 농업 비중이 쌀 농사에 치우친 것도 문제다. 쌀 과잉생산 구조가 굳어지면서 수익에도 영향을 미쳤다. 수입 쌀 여파에 1인당 연간 쌀 소비량까지 줄었다.
◇손 놓은 정부, 기대 접은 농민 = 양곡관리법은 과잉생산되거나 지나치게 가격이 내려간 쌀을 정부가 사들여 쌀값을 안정시키도록 하는 내용이다. 윤 대통령은 이를 ‘포퓰리즘’으로 규정하며 그 책임을 야당에 돌렸다.
“양곡관리법 하나로 모든 어려움이 해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를 풀 해법 중 하나지요. 그런데 정부는 그마저도 거부하잖아요. 주변에서 다들 분노가 컸어요.”
조병옥 씨는 거부권 행사 영향으로 이미 정부를 향한 기대를 거둔 지 오래다. 다만 정부가 패러다임을 전환해 농민들을 지원할 정책을 만들어주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다. 정부와 지방정부 모두 정책을 바꾸지 않으면 똑같은 결과만 반복될 뿐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역 문제 해결이나 농민 예산 직접 지원사업 확대 등 여러 가지 풀어야 할 내용이 많잖아요. 같은 방법으로 일하면서 다른 방법이 나오길 바라는 것은 잘못이지요. 공무원들 만나보면 다들 다른 방법을 강구하지 않아요. 정말 한심해요.”
◇의사가 떠넘긴 업무, 책임은 간호사가 = 1990년대부터 경남에서 간호사로 일한 정미경(가명·55) 씨는 병원에서 의사 업무도 봤다. 병원은 기본적인 환자 간호 역할만 시키지 않았다. 의사 대신 약 처방을 관행처럼 했다. 환자에게 호흡기로 연결되는 튜브를 삽입하거나 채혈하는 일도 했다. 심전도 검사 등도 도맡았다.
엄밀히 따지면 이는 모두 의사 업무다. 간호사가 하면 불법이다. 그러나 병원은 오히려 불법을 강요했다. 다른 간호사들도 병원 지시에 따르니 업계 관행상 거부하기 어려웠다.
“불법인 줄 알면서도 했어요. 하고 싶지 않아도 위계 관계 때문에 간호사가 대신할 수밖에 없어요. 대리처방을 보면 큰 병원은 의사가 20~30% 처방하고 70~80% 정도는 간호사들이 처방해요. 작은 병원일수록 간호사가 대리처방을 하는 비율이 더 높아요. 동료 말로는 80~90%가 한다고 들었어요. 모두 현장에 의사가 부족해서 일어나는 문제예요.”
심지어 그의 동료인 PA(의사 보조 간호사·Physician Assistant) 간호사는 환자 수술도 한다. 병원에는 전임 간호사, 전담 간호사 또는 PA 간호사가 있는데 PA는 병원에서 처방·진단부터 수술 업무까지 본다. 처방 대행, 수술 보조, 진단서 작성, 시술 등 사실상 의사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다.
◇간호법 때문에 두 번 울었던 간호사 = 정 씨는 자신을 비롯해 주변 동료가 불법적인 상황에 내몰린 점을 우려하고 있다. 간호법 제정을 바란 것도 그 때문이다.
실제로 의료법상 간호사가 수술 보조는 할 수 있어도 절개나 봉합 처치를 할 수 없다. 또 정맥 채혈은 간호사 업무지만, 동맥혈 검사는 동맥 폐색증 발생 우려가 커 의사가 해야 한다. 간호사는 의사 지도로 이뤄지는 진료를 보조하는 일을 하게 돼 있다. 하지만 간호사들은 의사 업무까지 보는 게 일반적이다. 경남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같은 문제가 벌어지고 있다.
“작은 병원은 불법 행위를 거부하는 간호사를 해고하는 일이 벌어져요. 정부는 이를 알면서도 제도 개선을 하지 않고 있어요. 본인 의지와 관계없이 불법 의료행위가 행해지는 만큼 간호법을 제정해 문제를 바로잡아야 해요. 그래야 환자가 받는 의료수준이 높아지죠. 간호사만 좋은 게 아니에요. 바빠서 안전사고가 나는 경우도 더러 있어요.”
그는 결과적으로 불법 행위에 따른 피해가 환자에게 돌아갈 수 있다고 지적한다. 또 초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 환자가 더 늘어나게 될 것이기에 숙련된 간호 인력을 늘려 이에 대비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한다.
“숙련된 간호 인력이 어느 때보다 많이 필요해진 시점이에요. 간호사를 흔히 ‘백의의 천사’라고 하는데 우리끼리는 업무가 너무 많아서 100가지 일을 해야 하는 ‘백 일의 전사’라고 표현하기도 해요. 24시간 내내 이어지는 업무로 떠나는 간호사가 많아요. 간호사 부족으로 현장은 더 힘들어지는 악순환 때문에 걱정이 많아요.”
윤 대통령이 대선 후보 당시 약속했던 간호법 제정을 지켰다면 의료계 상황이 나아졌을까.
“대통령이 간호법 제정을 약속해서 굉장히 반가웠어요. 국회를 통과했을 때 기뻐서 눈물 흘리는 간호사가 많았지요. 그런데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니 또 한 번 울었어요. 간호법 때문에 휴가를 내서 서울을 왔다갔다하고 그랬는데 허탈해요. 후배 간호사들을 위해서라도 적어도 OECD 평균 정도는 되는 환경이 만들어지면 좋겠어요.”
/최석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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