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권이 망친 세상 (상)
양곡관리법·간호법·노란봉투법 등
대통령 재의요구권 잇따라 행사
삶의 질 향상할 최소한의 장치
천신만고 끝 의결돼도 무용지물
오만하고 독선적인 권한 남발
누구의 '행복추구권'인지 반문
윤석열 대통령이 올해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한 법안이 많습니다. 양곡관리법, 간호법, 노란봉투법, 방송 3법입니다. 하나같이 국회 입법 과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은 법안입니다. 법안마다 국민의힘 반대에 부딪혔고 더불어민주당이 다수 의석을 바탕으로 가까스로 본회의에서 처리했습니다. 정책 수요자와 사회적 요구가 절실하지 않았다면 더불어민주당도 의결을 강행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모든 과정은 대통령 거부권 앞에서 ‘헛수고’가 됐습니다. 무너진 일상을 제도로 구제·보호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농민, 간호사, 노동자 등은 망연자실합니다. 거부권은 그들의 세상을 망쳤습니다.
법률안 거부권은 대통령 고유 권한이다. 헌법이 정한 입법부 견제 장치다. 국회에서 정부로 이송된 법안에 이의가 있을 때 행사된다. 국회 재심의 과정에서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법률로 최종 확정될 수 있다. 조건을 채우지 못하면 폐기된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법안은 모두 재심의 과정에서 폐기됐다. 지금까지 폐기된 4개 법안 가운데 농업·의료·노동 분야에 의미 있는 3개 법안 의미를 되짚었다. 아울러 법안이 폐기되면서 일상이 무너진 각 분야 종사자도 차례로 만났다.
◇양곡관리법이 포퓰리즘? =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내놓은 민생 1호 법안이다.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1호 법안이기도 하다. 지난 3월 23일 국회 본회의에서 개정안이 통과하자 윤 대통령은 4월 4일 거부권을 발동했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쌀이 과잉 생산되거나 쌀값이 크게 떨어졌을 때 정부가 이를 사들이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쌀 의무 매입으로 쌀값을 안정시키고 농민 부담도 덜어주자는 게 핵심이다. 또 농가에 다른 작물 재배를 지원해 과잉 생산을 막는 동시에 쌀에 집중된 농업구조를 분산시킨다는 의도도 있다.
윤 대통령은 “이번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농민과 농촌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전형적인 포퓰리즘 법안”이라고 규정했다. 혈세를 낭비하는 ‘남는 쌀 강제 매수법’이라며 법안 공포를 거부했다.
물론 양곡관리법이 쌀값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하지만 농업계는 양곡관리법 입법을 당장 닥친 위기를 극복하는 시발점으로 삼고자 했다. 대통령 거부권 발동은 그나마 남은 작은 기대마저 한 번에 잃게 했다.
◇대선 전 간호법 제정 약속 파기 = 간호법은 고령화로 늘어난 의료 수요에 대응하자는 취지로 추진됐다. 제정은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급물살을 탔다. 국가적 비상 상황에서 간호사들의 헌신이 주목받은 게 계기였다. 간호사 처우 개선 공감대가 커졌고, 간호·돌봄 체계 구축 목소리가 늘었다. 2021년 더불어민주당이 1건, 국민의힘이 2건씩 간호법을 발의했다.
3개 법안은 간호사 임무에 ‘진료 보조’라는 문구를 담지 않았다. 그 대신 ‘환자 진료에 필요한 업무’라는 표현을 썼다. 보조라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고 의사와 간호사 사이 관계를 종속적으로 규정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의사협회 등 간호법 반대 단체는 ‘진료의 보조’라는 문구가 삭제되자 강하게 반발했다. 반대 분위기에 부딪히자 대선 때까지만 해도 간호법 제정을 약속했던 국민의힘은 태도를 바꿨다. 결국 국회는 관련 조문을 없애고 의료법과 같은 문구로 수정했다.
간호법에서 논란이 된 또 다른 핵심 쟁점은 ‘지역사회’ 표기 문제였다. 법안에 이 문구가 들어간 채로 제정이 이뤄지면 간호사들이 지역에서 단독으로 의원을 열 수 있다는 우려가 의사단체에서 나왔다. 현행 의료법상 의료기관은 의사만 운영하도록 규정돼 있는데도 막무가내였다. 간호법은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국회를 통과했지만 이 과정에서 국민의힘은 결국 간호법 표결을 거부했다. 윤 대통령은 5월 16일 “이번 간호법안은 과도한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며 거부권을 행사했다.
◇또 좌절된 노동자 보호 장치 = 노란봉투법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개정안을 일컫는 다른 이름이다. 쌍용차 노동자에게 전달된 해고통지서가 노란봉투에 담겼고, 월급을 노란 봉투에 담던 과거 사례에서 명칭이 착안됐다.
노란봉투법은 캠페인으로 논의가 시작됐다. 발단은 2013년 12월 쌍용차 노조가 47억 손해배상을 판결받았다는 <시사IN> 기사를 본 배춘환 씨가 손배 판결을 받은 이들을 돕고 싶은 마음에 편집국장 앞으로 편지를 쓰면서 비롯됐다. 봉투에 4만 7000원을 담아 보냈다. <시사IN〉이 2014년 신년호에 이를 소개하면서 모금 행렬이 이어졌다. 14억 6874만 1745원이 모였다.
공을 넘겨받은 국회는 노란봉투법을 발의했다. 노조 활동 범위를 확대하고 손해배상 면책 범위를 넓히는 내용이다. 노조가 아니라 개인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금지하는 내용도 담겼다. 하지만 정치권 논의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법안은 임기 만료로 폐기 절차를 밟았다.
노란봉투법 논의에 다시 숨을 붙인 것은 지난해 7월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 하청노동자 파업이다. 51일간 파업 끝에 노사는 임금 4.5% 인상에 합의했다. 하지만 파업을 주도한 노동자에게 돌아온 것은 사측의 470억 원 손해배상 소송이었다.
노란봉투법이 다시 국회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노동계를 비롯해 사회적 요구도 점점 거세졌다. 지난 11월 9일 더불어민주당·정의당을 비롯한 야권은 국회 본회의에서 노란봉투법을 통과시켰다. 174명이 투표에 참여해 찬성 173명, 기권 1명으로 법안은 가결됐다.
노란봉투법은 11월 17일 정부로 이송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12월 1일 거부권을 행사했다. 노동현장에 막대한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이 때문에 노동자들은 기업의 무분별한 손배·가압류 부담에서 벗어날 기회를 잃었다.
한화오션은 470억 원 손해배상 소송을 여전히 강행하고 있다. 지난 21일 창원지방법원 통영지원에서는 2차 공판이 열렸다.
/최석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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