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운동회에 초대합니다

가을을 담는다. 울긋불긋 물든 길을 걷는다. 솔솔바람이 스칠 때마다 감색 고운 선율을 탄다. 아이들이 빨갛고 노랗게 물들어 주황빛으로 익어가고 있다. 재잘대는 아이는 창공을 비상하고 고개를 숙이고 걷는 아이는 길 위의 철학자처럼 고뇌의 표정을 짓는다. 가을 바람이 아이들을 황금빛 주단에 올려놓았다. 어느새 강렬한 빛이 유순해진다. 빛의 속도는 멈추고 빛깔은 홍당무로 변신한다. 이를 필자는 아이들이 움직임에 따라 출렁이는 ‘아이 색깔’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김해 대청천의 가을 숲이 깊어가고 있다. 아이들이 손을 잡고 하천변을 걷는다. 숲을 파고든 햇살이 음영을 만들고 스펙트럼을 확장한 알록달록한 색을 비춘다. 비친 색에 다시 눈부시게 수놓아진 아이들을 바라보는 선생님의 두 눈이 곱게 물들었다. 참으로 곱다. 아이들을 닮아서 고운가. 눈부신 아이를 닮아서 눈부신가. 하천에 살포시 앉은 낙엽 하나가 동심원을 그린다. 그 마음 나는 다 안다고 나에게 속삭인다. 나도 한때는 꿈을 먹는 선생님이었거든. 그때는 어디든지 스며들고 싶었지.

김해 율하체육관에서 열린 ‘푸른 지구 한마음 가족 운동회’에서 아이들이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박영희
김해 율하체육관에서 열린 ‘푸른 지구 한마음 가족 운동회’에서 아이들이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박영희

아이들은 손끝으로 가을을 빚는다. 낙엽을 모아 꽃다발을 만들겠다는 발상이 널브러져 있다. 아이는 마음에 비축한 각각의 낙엽 모양을 골라 두 손 높이 들어 빛을 모으고, 도토리를 주머니 속에 넣어 딸랑딸랑 흔들며 바람 소리를 감지한다. 햇빛 아래에서는 셀로판지를 들어 “여기 이런 색, 저런 색 있어요!”라면서 빛의 움직임을 따라간다. 대청천에 나들이 갔을 때는 반려 돌멩이를 집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오래오래 들여다보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아이는 가까이서 바라보면 볼수록 영특한 존재다. 광합성이 멈추고 엽록소가 소진되면 단풍이 진다는 원리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학습하는 아이보다 체험하는 아이가 생각이 더 진중해진다. “아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할 것인가.”라는 교육현장의 오래된 ‘화두’는 일선 교육현장의 종사자는 다 알고 있다. ‘경쟁 논리’가 얼마나 비교육적이라는 것을.

아이들의 움직임은 어디서나 빛난다. 가족들과 함께 한 ‘푸른 지구 한마음 가족 운동회’가 열렸다. 율하체육관 천장까지 울려 퍼진 함성은 가을 하늘을 활짝 열어젖혔다. 파란 스카프를 두른 아이들은 바다 팀, 분홍스카프를 맨 아이들은 태양 팀으로 나누었다. 아이들은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발산할 것이다. 부모의 손을 잡고 뛰고 구르는 어린 1세 아이들은 ‘“나 여기 있다는” 존재감이 서린 위엄을 갖춘다. 2세 아이들은 친구의 손을 잡고 나란히 걸어 나왔다. 체육관이 꽉 채우진 느낌이다. 중세의 봉건 군주처럼 보폭도 당당하다. 마치 자신이 영주에게 하사한 봉토를 확인하듯 야망이 어른거린다. 인간성 회복을 작품에 담았던 르네상스의 조각가들처럼 옆 지기 친구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몸동작이 빠른 3세 아이들은 대항해 시대의 신대륙을 향해 나아갔던 젊은 탐험가처럼 거침이 없다. 4세, 5세 아이들은 눈빛을 교환하면서 발을 맞추고 전략을 세우면서 승리의 깃발을 기필코 꽂겠다는 각오가 대단하다. 그 눈빛에는 고대 장군과 전사들이 전장을 누볐던 용맹함과 지략을 갖추고 있다. 그러면서 이 아이들은 인문주의자로서의 감성 꽃이 활짝 피었다. 투지를 다지는 굳건함의 이면에는 이 체육행사의 멋진 마무리까지 계산에 넣는 것 같았다.

‘푸른 지구 한마음 가족 운동회’에서 빨간 천 위를 달리는 아이들. /박영희
‘푸른 지구 한마음 가족 운동회’에서 빨간 천 위를 달리는 아이들. /박영희

그 옆을 온화한 부모님의 손길이 감싸고 있다. 가을 체육행사는 아이가 주인공이지만 빛나는 조연이 따로 있다. 부모님이다. 가슴 졸이며 지켜보고 뿌듯해한다. 깊은 안도와 웃음을 머금은 미소로 넉넉한 애정을 발산한다. 아이들도 가만있지 않는다. 부모의 마음을 흔들어대는 의젓한 재롱둥이 잔치로 화답한다.

승부·경쟁 얽매이지 않아
재롱잔치 연상케 한 행사
세대 간 벽 자연스레 사라져

아이들 운동회는 처음과 끝이 노란 속살로 무르익는다. 제일 먼저 아이들이 좋아하는 ‘아기 상어’ 노래가 분위기를 휘어잡는다. 음악에 맞춰 몸 풀기 체조를 하는 게 앙증맞다. 작은 팔과 다리가 리듬을 타기 시작하자마자 아이들의 길잡이인 선생님들은 각 팀의 선수들을 줄 세운다.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10명씩 짝을 지어 돌고 춤추다가 만난 팀과 합치고, 또 마주 보는 팀과 손을 맞잡고 돌고 인사하고 춤추는 거대한 동그라미가 천천히 굴러가고 합해지고 떨어진다. 아이들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름 ‘엄마’가 박수 장단에 맞춰 춤을 추고 박장대소를 굳이 숨기지 않는다. 이른바 ‘가족 단합 게임’이다. 아이들 운동회는 단합과 게임이 분리되지 않으니 승부니 경쟁이 없다. 평소 얌전하던 어머니들도 아이들과 함께라면 한순간에 날개를 단 무용수로 변한다. 아이의 웃음이 손짓이 되고 아이의 발걸음이 음악이 되어 몸과 마음이 조금의 엇박자인 엄마의 행동을 가볍게 끌어올린다. 아이의 밝은 웃음이 아빠의 박자가 되었고, 할머니 할아버지의 덩실한 춤이 체육관 바닥 위에 가을빛을 받아 한 겹 더 물들었다. 세대가 달라도 모두가 한 장단에 맞춘 가족은 소우주가 되었다.

‘푸른 지구 한마음 가족 운동회’에서 천 위를 달리는 아이들. /박영희
‘푸른 지구 한마음 가족 운동회’에서 천 위를 달리는 아이들. /박영희

‘5인 6각’에 나선 엄마들은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숨 고르기를 하였고 어떤 팀이라도 상관없이 “하나, 둘” 구령을 맞추며 격려해주었다. 이어서 ‘천하장사 만만세’가 열렸다. 빨강과 파랑의 긴 천을 큼직한 어른들이 손으로 잡아주면 그 위로 아이들이 뛰어서 들어오는 게임이다. 파도처럼 출렁이는 천을 놓칠세라 더욱 굳게 쥐는 부모의 마음을 아는 듯 아이들은 두 볼 가득 환한 웃음이 피워 올랐다. 아이 한 명 한 명이 두 손 들고 들어오는 순간은 장엄한 파노라마를 연출했다. 체육관 전체가 거대한 물결로 포효했다. 아이는 색을 따라가고, 어른은 그 색을 붙잡아 아이를 끌어안았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깨끗한 지구 함께 달리기’에서 각 팀의 대표 아이와 선생님, 엄마와 아빠가 함께 이어달리기에 나섰다. 어른의 허리만큼 오는 아이들의 각오는 대단했다. 바통을 꼭 쥔 아이들의 주먹을 바라보는 부모님의 심정은 현재보다 미래의 지구를 책임져야 할 각오를 가슴 깊이 다졌을 것이다. 최종 결승선을 향해 두 바퀴를 전력 질주하는 아빠의 우렁찬 질주 본능을 아이들은 온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손녀, 손자와 함께한 이 순간을 뜨겁게 새겼을 것이다. 세대와 세대가 서로를 향해 달려가는 장면에는 생채기를 내는 그슬음이 없다. 가슴이 뜨거워질 뿐이다.

가을을 만끽하는 아이들. /박영희
가을을 만끽하는 아이들. /박영희

가을은 아이들 곁에서 가을로 다시 태어난다. 숲에서 빚은 색과 체육관에서 뛰어오른 숨결이 하나로 이어진다. 가을을 담는다는 것은 세모난 돌멩이가 네모로 바뀌고 네모의 돌멩이는 다시 둥근 하늘을 닮는다. 가을 운동회는 아이들의 발끝에서 되살아나고 부모의 손끝에서 다시 갈무리하고 조부모의 웃음에서 무르익어간다.

/박영희 국공립장유어린이집 원장

☞ 필자는… 아이, 교사, 부모의 세계를 잇고 유보통합을 선도하는 ‘영유아학교 시범기관’ 국공립어린이집의 원장이자, 교육학 박사입니다. 어려움과 관계의 갈등을 함께 마주하며, 따뜻한 마음으로 성장과 배움의 기쁨을 나누는 전문상담사입니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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