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너리댁의 밥상] 가만있어도 못살게 구는 11월

지내기 어려운 달이다. 아직 나뭇잎이 듬성듬성 붙어 있지만 코끝의 공기는 얼어붙어 냄새마저 남기지 않는다. 외투의 두께가 하루의 컨디션을 결정하는 날들. 매일 아침마다 그 두께를 고르지 못해 출근 시간은 조금씩 늦어진다. 차라리 한 번에 추워지면 좋으련만. 하루에도 수십 번 바뀌는 공기와 마음의 결을 따라 서성인다. 가만히 있어도 흘러갈 30일이지만 11월은 이렇게 우리를 못살게 군다. 찔끔찔끔 변하는 날들 속에서 점점 두꺼워지는 옷들로 몸을 감싸도 마음은 둔해지지 않는다. 손끝이 얼어붙어 키보드를 누르기 어려워도 생각은 그 반비례로 날이 선다. 11월의 모든 것들이 마음의 표면을 날카롭게 만든다.

11월은 아무것도 실컷 할 수가 없다. 하다못해 밭에 있는 감은 아직 땐땐해서 떫은 맛만 난다. 그중에서도 해를 잘 받아 금방 물러진 것 최대 두어 개만 먹을 수 있다. 대봉감 홍시라도 원 없이 먹고 싶어도 이리 찌르고 저리 찌르며 재보다가 가장 잘 익은 하나만 먹게 된다. 너무 일찍 손대면 떫고, 너무 늦으면 썩는다. 딱 좋을 때를 찾는 게 어렵다. 그래서 자꾸 감을 건드리며 이 정도면 괜찮을까, 아직일까? 중얼거리게 된다. 아직 단단하고 아직 때가 아니다.

11월의 감은 아직 땐땐해서 떫은 맛만 난다. /김윤지
11월의 감은 아직 땐땐해서 떫은 맛만 난다. /김윤지

늘 아직이라고 믿었다. 여전히 괜찮고, 익으려면 한참이나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는 동안 무언가가 조금씩 변했다. 움직임이 느려지고 자꾸 잊었다. 그걸 알면서도 하루하루 만져보기만 했다. 아직 괜찮을 거라며 스스로 안심시켰다. 하지만, 11월은 그 ‘아직’을 깨부순다. 떫던 감이 하루아침에 물러지듯 마음도 그렇게 무너진다. 이제는 바람이 차가워지고 손끝이 자주 시리다. 부정할 수가 없다. 시간은 이미 흘렀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차츰 희미해지는 할머니 기억
붙잡아두려 칠판에 메모 남겨
가족사진·약 체크·퇴근시간 등
너무 가까이 찾아와버린 변화
피할 수도 없어 버티고만 있어

계절을 하나씩 음미하며 보냈을 뿐인데 많은 변화가 생겼다. 관성적으로 경제학 문제집을 펼쳐 식을 세우던 나는 이제 돈을 번다. 그리고 주소지가 바뀌었다. 심지어 어렸을 때 쓰던 번지가 아닌 도로명 주소로. 큰 변화만을 느끼느라 작은 일에는 무관심했다. 아니, 무시하려 노력했다. 할머니에게도 변화가 쌓여 있었다. 우편함을 열기 두려워 내버려둔 독촉장처럼, 그 시간은 한참 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너무 쌓여서 우편함 문이 스스로 열려 닫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문이 닫히지 않는 달, 그게 매년의 11월이다. 왜 하필 11월인지는 잘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늘 이 무렵이었다. 완전히 춥지도, 그렇다고 따뜻하지도 않은 공기. 두꺼운 옷을 입자니 답답하고, 벗자니 춥다. 계절이 결정을 요구하는데 몸은 아직 결심하지 못한 채 머뭇거린다. 감은 아직 단단하고, 바람은 아직 맵지 않다. 모든 게 아직인 것처럼 굴지만 사실은 이미 변하고 있다.

자꾸 빠져나가는 할머니의 기억을 위해 화이트보드를 준비했다. /김윤지
자꾸 빠져나가는 할머니의 기억을 위해 화이트보드를 준비했다. /김윤지

화이트보드가 하나 생겼다. 오늘의 날짜와 약 복용 시간, ‘윤지가 집에 오는 시간 저녁 10시’가 적혀 있다. 어디에 둘지 잠시 고민했다. 거실에 두자고 했지만 할머니는 부끄럽다며 방 안으로 옮기려 했다. 할머니와의 자리싸움에서는 내가 이겼다. 이겨야 했다. 그건 변화를 기록하기 위한 게 아니라 더는 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산 것이니까. 할머니가 그걸 부끄럽다고 한 건 어쩌면 나처럼 당신에게 생긴 변화를 인정하기 싫어서였을지 모른다. 나이 들어간다는, 기억이 흘러내린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루를 정리하며 화이트보드에 내일의 날짜와 요일을 쓰는 건 내 일이 되었다. 다행히 나보다 일찍 일어난 할머니가 그걸 보고 오늘이 몇 월 며칠, 무슨 요일인지는 잘 알아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날짜와 요일은 바뀌니까 기억하시는데, 아침약 저녁약, 윤지가 오는 시간처럼 늘 같은 것들은 자꾸 빠져나간다. 그래서 약을 안 챙겨 드셨을까 봐, 내가 열 시에 온다 해도 분명히 그보다 훨씬 전부터 추운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퇴근길 마음이 매번 조급해진다.

어쩌면 우리 집에서 제일 늦은 건 나일 것이다. 조금씩 뒤처지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순응해야만 버틸 수 있는 날들의 연속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는 날씨처럼 마음도 들쭉날쭉하다. 견디려면 계속 맞춰야 하는데 그게 생각보다 어렵다. 스스로 온도를 조절하는 건지 그냥 식어가는 건지 헷갈린다. 이렇게 하루하루 버티다 보면 결국 어떤 일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무너지는 게 아니라 그냥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걸. 에너지를 다 써버린 자리에 남는 건 체념이 아니라 약간의 평온이다. 내년에도 아마 비슷할 것이다. 또 25년 11월의 기억을 떠올리며 모른 척하겠지. 괜찮다고, 아직이라고, 스스로 속이면서. 그러다 26년 11월이 오면, 그때 쌓은 벽이 무너지고 다시 그 시절의 얼굴을 떠올리겠지. 그때마다 마음은 조금씩 부서질 것이다.

그래서 11월은 쉽지 않다. 변화가 너무 가까이 와서 피할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다. 그 한가운데서 그냥 버티고 있을 뿐이다. 시간은 늘 그렇듯 발신인도 없이 도착한다. 되돌려 보낼 방법은 없다. 어쩔 수 없이 오늘도 택배를 받으면 그 안엔 어김없이 무언가가 들어 있다. 마음이 아파 버리려다 또 주워담는다. 착불인 걸 알면서도 요금을 미루고 또 미룬다. 그동안의 시간을 즐기기 위해.

/김윤지 하동군청 근무

※ 필자소개 (얼떨결에 담담하고 소박한 이야기를 쓰게 되었지만 속은 아주 기름지답니다. 간혹 글에 누런 기름이 뜨더라도 페이퍼타월처럼 저를 감싸주시고 닦아주시길 바랍니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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