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공감의 사회 리듬 사라져가
‘우리’의 세계 잇는 게 문화 역할

모든 정보가 나를 중심으로 정렬되는 사회, ‘초개인화(hyper-personalization)’의 시대가 우리 앞에 도래했다. 기술은 개인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감정의 흐름까지 예측한다. 이 편리함은 분명 이전 세대가 누리지 못한 새로운 자유이지만, 동시에 사회적 관계의 균열을 예보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모든 것이 무한히 연결되어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 한 개인은 고립되어 간다. 이것이 초개인화의 역설이다. 개인의 감정과 행위는 데이터가 되고, 취향은 수치로 환원된다. 문화의 중심이 ‘공동체’에서 ‘개인’으로 이동하면서 무언가를 함께 하는 경험이 점차 줄어들고, 문화는 개인의 기호를 중심으로 작동되어 간다. 사람들은 사회적 관계망의 ‘좋아요’의 개수나 ‘댓글’로 공감을 확인하고, 취향의 일치로 관계를 맺고는 한다. 관계를 맺는 방식이 ‘공동체의 공감’에서 ‘데이터의 유사성’으로 옮겨간 것이다.

초개인화의 본질은 ‘예측’이다. 플랫폼은 사용자의 행동을 예측하고, 그에 맞는 콘텐츠를 끊임없이 제시한다. 기술이 만든 편리함은 ‘낯섦의 가치’를 수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화의 본질은 운동성, 흐름과 같은 예측 불가능성에 있으며, 낯선 경험, 예상치 못한 감정, 나와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지금은 낯섦이 불편함으로, 불확실성이 오류로 인식된다. 개인의 세계가 풍요로워질수록, 사회와의 연대는 느슨해질 수밖에 없다. 모두가 자신의 취향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공유와 공감의 사회적 리듬이 만들어지기 어려운 시대이다. 세대 간의 간극도 더욱 심화한다.

초개인화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는 여전히 그 속에서 ‘연결의 기술’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거대한 구조의 복원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작고 느린 촘촘한 관계의 회복이다. 같은 영화를 보거나,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같은 전시를 마주하거나, 또는 같은 와인을 마시면서 그 안에서 자신이 느낀 세계를 언어로 꺼내는 순간 문화는 다시 ‘우리’가 될 수 있다. 타인의 감정을 듣고, 나의 감정을 말하는 그 과정이야말로 사회적 공감의 시작이다. 그것이 문화가 품고 있던 사회적 힘이다. 결국, 문화는 관계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술은 인간을 더 세밀하게 구분하지만, 예술과 문화는 다시 우리를 이어준다. 초개인화의 시대일수록 문화는 더욱 인간적일 필요가 있다. 나의 세계에 머무르지 않고, 타인의 세계를 바라보는 일. 서로의 감정을 번역하는 일. 그것이 이 시대의 문화가 맡아야 할 새로운 역할이 아닐까.

초개인화는 고립의 언어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이 자신을 세밀하게 이해하기 시작한 첫 번째 단계일지도 모른다. 각자의 세계가 더욱 뚜렷해질수록, 우리는 서로의 세계를 향해 질문을 던질 이유를 얻게 된다. 문화는 그 질문이 오가는 장(場)이다. 나와 다른 감정, 나와 다른 언어, 나와 다른 시선을 마주하는 자리. 그 낯섦 속에서 우리는 다시 ‘우리’를 배운다. ‘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의 세계를 잇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누군가와 함께 본 장면, 함께 들은 음악, 함께 웃고 울었던 순간이 결국 사회를 하나로 엮는다. 초개인화 시대, 문화의 과제는 단순하다. ‘나를 위한 것’에서 ‘우리의 것’으로 시선을 옮기는 일. 그 전환이 이루어질 때, 문화는 다시 사회를 잇는 언어가 될 수 있다.

/김나리 피에스아이 스튜디오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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