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년 전처럼 교역 협박하는 미국
척화비 속 대원군 말씀 들리는 듯
창녕군 창녕읍 교상동의 읍사무소 위에 만옥정 공원이 있다. <창녕군지>에는 척화비가 ‘창녕읍 교하동에 있던 것을 광복 후 만옥정 옆으로 옮겨 왔을 것으로 생각된다’라고 한다. 높이 123㎝의 자그마한 비석이 기단도 없이 조촐한 모습으로 서 있다. 돌거북 받침대도 없다. 그나마 없어지지 않고 154년간 의젓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게 다행이다.
통상을 요구하며 미국이 일으킨 신미양요가 한창이던 1871년 4월 25일, 병인양요의 프랑스를 성공적으로 물리친 흥선대원군의 지시로 서울 종로 거리와 전국 중심지에 큰 글씨로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이라고 새긴 척화비를 돌거북 받침대 위에 세우도록 했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아니하는 것은 화친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대원군은 맹목적인 쇄국이 아니라 서양 무기를 수입하는 등 군사개혁도 추진했다. 그러나 1873년 자신이 간택한 며느리인 명성왕후와 수구파에 의해 집권 10년 만에 밀려났다. 역사연구가 이광희는 정작 나라를 망하게 한 세력은 척화파가 아니고 민씨 외척을 중심으로 한 수구파라고 한다.
이 틈을 노린 일본은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으로 인해 자기들이 입은 피해 보상과 제물포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이 문제를 협의하다가 판리공사인 하나부사 요시모토는 척화비 철거를 요구했다. 고종은 설치한 지 불과 11년이 지난 1882년에 모두 뽑으라고 명하였다. 절대 권력자인 임금의 명령과 일제의 색출에도 살아남은 척화비는 대부분 파묻혔거나 파손되었다.
서울 종로의 척화비는 총독부의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준비가 한창이던 1915년 여름, 도로확장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다. 강원도에서는 횡성읍 읍상리 횡성성당 정문 앞 개울에 버려져 있던 척화비를 발견했다. 해방 후에는 역사의 수치라는 이유로 페인트를 칠하는 등 훼손되는 수모도 겪었다. 산청군에는 사람의 왕래가 많은 환아정 앞에 세워졌다. 경술국치 당시 일본인이 들어와 두 조각으로 깨뜨려 땅에 묻었다. 산청초등학교 건물을 새로 짓다가 발견했다.
150여 년 전 프랑스와 미국이 교역하자는 자기들 요구를 거절한다고 총과 대포를 쏘고, 사람을 죽인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침략인데 이번에는 더 황당하다. 지난 9월 미국 이민세관단속국은 조지아주 현대차그룹-엘지에너지솔루션의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서 무장한 요원들이 한국인 노동자 317명을 체포해 구금했다.
워싱턴에서는 7월부터 관세 협상을 하면서 3500억 달러를 직접투자 방식으로 미국이 원하는 곳에 투자하라고 한다. 이건 통상이 아니고 백지수표를 요구한 것이고, 협상이 아니라 일방적인 요구다. 대원군 시절과 다른 것은 무력이 아니라 관세를 휘두르는 건데 결국 그게 그거다. 병인양요, 신미양요처럼 2025년판 을사양요(乙巳洋擾)다. ‘요(擾)’자는 ‘어지러울 요’다. 맹방인 줄 알았는데 자기들 땅에서 자기들이 어지러움을 일으켰다.
만옥정 공원의 척화비를 보니까 막강한 힘을 가진 침략자에게 굴복하지 않은 대원군이 ‘우리를 도와주는 것처럼 보이는 강대국들도 모두 자기 이익이 우선이다. 지나치게 믿지 마라. 그 나라를 위해 우리끼리 싸우지 마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힘으로 나라를 지키는 것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배워라’라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것 같다.
/전점석(경남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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