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의 미국 보수 인플루언서 추모 물결
그들은 애도를 도구화하는 거은 아닐까

난데없이 한국 땅에까지 밀려온 미국 보수 인플루언서 찰리 커크에 대한 추모 물결은 가히 죽은 자인 찰리 커크가 살아있는 이 땅의 보수세력을 일으켜 세우는 것 같아 보였다. 그에 대한 추모의 물결은 그의 생전 문제가 되었던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나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극단적인 배타성의 문제를 덮을 만큼 강력해, 어느 매체도 공공연히 비판하지 못했다. 서울 시내 곳곳에 국화꽃 더미와 함께 “우리가 찰리 커크다”라는 문장이, 노골적인 혐오 표현들에 둘러싸여 전시되었다. “짱깨, 북괴, 빨갱이는 대한민국에서 빨리 꺼져라” 등의 멸공과 혐중의 구호 속 애도를 정치적 혐오 선동의 방식으로 ‘활용’하는 모습은 살아생전 커크가 주창했던 ‘혐오 표현의 자유’를 대한민국 극우의 방식으로 부활시킨 것이 아닌지 착각하게 한다.

기이했던 것은 빼곡히 붙은 노란 포스트잇과 같이 한국에서 사회적 참사를 거듭하며 형성된 추모 문화의 상징들이 그들의 추모식에서도 고스란히 사용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애도가 왜 그것이 동반하는 강력한 슬픔의 정동이나 애도의 모습·형태만으로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윤리’로서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없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찰리 커크를 추모했던 이들의 슬픔이 거짓되었다거나 그들이 공감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상실감과 슬픔이 너무도 강렬하고 진실돼 보였기에 더더욱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떤 타자의 어떤 고통에 공감하고 있는가? 왜 이 추모‘들’은 한편 닮았으면서도 이토록 이질적인가? 이것이 과연 단지 정치적 진영과 당파의 문제인 것일까?

비슷한 고민을 했던 학자가 있다. 일본의 오카 마리 교수는 ‘위안부’ 여성들에 대한 공감과 양립할 수 없는 참전군 아버지나 할아버지에 대한 공감의 문제를 고민했다. 그는 공감이란 인간에게 원래부터 주어진 보편적인 감정이 아니라, 어떤 감정적 장치나 상황에 따라 쉽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만약 두 공감이 모두 ‘감정에 호소하는 고통’이라는 같은 기반에서 출발한다면, 공감의 방향은 상황에 따라 쉽게 뒤바뀔 수 있다. 오카 마리는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똑같이 느낄 수는 없지만, 타인에 대해 상상적으로 동일시했을 때 가능해진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공감은 타인을 ‘순수하고 비참한 피해자’라는 이미지 속에 가두어버리는 위험이 있다. 그래서 그는 공감은 “나는 네가 아니다”라는 인식으로부터 내 고유의 고통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느끼는 건 거창한 감정이 아니라, 어쩌면 압도적인 무력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 무력함이, 공감이 시작되는 자리라고 그는 강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공감은 나에게 발생하는 또 하나의 폭력적 사건이 된다.

그러니 우리는 이 애도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지 반드시 질문해야 한다. 애도는 필히 정치적이다. 특히 그 죽음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을 때, 우리에게 과제를 남길 때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어떤 상실은 우리를 투사로 만들고, 그런 투쟁들이 모여 정말로 역사를 바꾸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만큼 애도는 우리에게 중요한 화두이기에, 우리 산 자들은 애도라는 이름으로 망자를 도구화하기보다 산 자의 철저한 무너짐과 무기력함을 매개로 망자가 일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상실이 주문하는 고통의 자리에 머물러 간신히 애도를 말해야 한다.

/백소현 프리랜스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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