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프랑스 역사가 이폴리트 텐은 1860년대 영국을 관찰한 후 이 나라 지도계급이 지닌 정신적 활력을 높게 평가한 바 있다. 이폴리트 텐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당시 영국에서는 급진파 리더들조차 지도계급을 긍정하며 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귀족계급을 타도하는 것은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 우리는 국가 지도를 그들의 손에 맡겨두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나랏일이란 외부 압력이나 이기적 유혹을 물리치고, 자신의 입장을 확립한 사람들에 의해서 수행돼야 한다는 점을 우리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영국을 지배하던 귀족계급을 다른 시대 다른 체제에 아무렇게나 대입할 순 없지만, 적어도 나라를 이끄는 엘리트가 지녀야 할 기본 품성을 지적했다는 점에서 160년 전에 나온 이 이야기는 경청할만하다.
방점은 ‘외부 압력과 이기적 유혹’에 찍힌다. 영국인들은 이를 극복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엘리트들에게 굳건한 신뢰를 보냈다. 물론 그 시절 영국에도 브로커와 정치 모리배들이 우글거렸지만, 큰 흐름은 텐이 말한 대로였다.
사법개혁이 화두로 떠오르고, 대법원장이 정치 관여 의혹을 받는 상황에서도 사법부가 집권여당의 개혁안을 사실상 반대하고 있다. 내란이 벌어졌을 때나, 법원이 폭도들에 의해 침탈될 때 헌법을 수호해야 한다는 작은 몸짓 한 번 하지 않던 이들이, 자신들의 권한이 줄어들 위기에 처하자 ‘사법부 독립’을 불변의 주문인양 외치고 있다.
현대 민주국가를 이끄는 삼권(입법·행정·사법)은 선출이든, 임명이든 선택된 엘리트들이 맡고 있다. 이들이 ‘외부 압력과 이기적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굴종과 보신에 매몰된다면, 그 사회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지금 국민 신뢰를 상실한 사법부가 갑자기 눈을 부라리며 독립을 부르짖고 있다. 그로테스크하지 않은가?
/구주모 경남도민일보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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