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너리댁의 밥상] 산중호걸 호랑님의 생일상

외국 사는 큰아들·증손주 생각에
만나고 싶은 지 사진만 뚫어져라
할머니가 생신 날 진정 바란 건
맛난 음식보단 가족 뿐이었네

막내딸 집에서 조촐하게 이루어진 촛불도 없는 생일파티, 심지어 꼬깔모자마저 빠뜨려 임시방편으로 윤지의 코끼리 세안밴드를 쓰고 있는 호랑님. 작은 아들은 깜찍한 호랑님의 모습에 함박웃음을 짓는다. /김윤지
막내딸 집에서 조촐하게 이루어진 촛불도 없는 생일파티, 심지어 꼬깔모자마저 빠뜨려 임시방편으로 윤지의 코끼리 세안밴드를 쓰고 있는 호랑님. 작은 아들은 깜찍한 호랑님의 모습에 함박웃음을 짓는다. /김윤지

산중호걸 호랑님의 생일날이 되어 각색 짐승 모두 자리에 모여 잔치가 열렸네.

하동군에서 농어민수당이라며 하동사랑상품권을 나눠주었다. 호랑님은 그걸 아껴두셨다가 창원으로 막내딸이 오라 하자 꼬깃꼬깃 접힌 3만 원을 찾아내셨다.

“윤지야, 창원 가기 전에 재첩국이나 좀 사 가자.”

사위 집에 며칠 신세를 지는데 빈손으로 가기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예전 같으면 굳이 살 필요도 없는 게 재첩이었다. 호랑님이 어릴 적 살던 동네 방천에는 재첩이 천지였다. 물론 재첩 잡는 아지매들이 물에 발이라도 담글라치면 호통을 치며 쫓아내곤 해서 자주 먹지는 못했다. 그래도 어린 동생들을 시켜 몰래 몇 주먹만 잡아오면, 어매가 시원한 국을 끓여줬었다. 하지만, 지금은 값비싼 돈을 줘야 맛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갱조개가 이렇게 귀해질 만큼 세월이 흘렀구나 싶다가, 나도 많이 늙었구나 하는 마음이 스쳤다. 자연스럽게 오래 살아 자식들 고생만 시키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된다. 그래도 자식들이 전화를 걸어오고, 주말에 얼굴 비치러 오면 그게 그렇게 좋다. 결국, 내 새끼들 한 번 더 보려고 사는 것이라 놀려도 할 말이 없다.

창원에 도착하니 막내딸이 휴대전화도 새로 바꿔드리고, 요즘 젊은이들이 간다는 별다방 커피숍에도 모시고 갔다. “엄마! 이제는 휴대전화를 조심히 써야 돼! 왜 자꾸 충전기를 부러뜨려~”라고 장난스럽게 핀잔을 줬다. 나름 휴대전화를 사용한 지 15년이 다 되어 가는데 도통 그놈의 충전은 어렵다. 충전을 할라치면 입을 꼭 다물고 있던 것이 윤지 손만 거치면 충전이 된다. 휴대전화도 나이 많다고 놀리는 것 같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면 늙어서 주책이라 할까 봐 억울해도 입을 닫았다. 그렇게 도시 바람을 쐬며 하루가 흘렀다.

다음 날에는 본격적으로 호랑님의 생일잔치가 이어졌다. 작은아들이 예약해둔 만두집에 가족들이 모였다. 농협마트에서 파는 기다란 만두가 아니라 하나하나 정성 들여 빚은 모양이 예뻤다. 상 위에 놓인 만두를 바라보던 호랑님은 한숨을 내쉬었다.

“문디, 다 늙은 내 생일 때문에 자식들이 돈을 수타 썼을기라.”

이번 생일에도 큰아들은 오지 못했다. 큰딸도 바빠서 오지 못했지만, 특히 큰아들은 얼굴을 본 지가 오래되어 마음이 더 쓰였다. 엄마 생일은 물론이고 한국에도 발을 들인 지 오래라 걱정이 앞섰다. 그 나라가 수악하게 덥다던데, 얼굴이 ‘팥 이파리맨치로’ 된 건 아닌지(팥 이파리; 살이 빠져 갸름해진 얼굴을 할머니는 이렇게 표현하셨다), 이제 돌 지난 손주는 또 얼마나 보고 싶을까.

큰아들이 이번 추석에는 한국에 올 수 있으려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호랑님. /김윤지
큰아들이 이번 추석에는 한국에 올 수 있으려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호랑님. /김윤지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 작은아들이 사근사근하게 물어왔다.

“엄마, 입에 좀 맞나? 이게 중국식 만두라네.”

엄마가 이런 건 못 드셔봤을 거라며 먹여드리고 싶어 데리고 왔다는 말에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또다시, 큰아들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가던 길에 전화를 걸어왔던 기억이 스쳤다. “우리 아들도 저 만두 많이 먹어봤을라나….”

호랑님은 막내딸이 접시에 놓아준 딤섬을 집어들었다. 한입 베어 물자 뜨거운 국물이 주르륵 흘러 옷을 적셨다. “아이고, 엄마. 이거는 육즙이 많아 조심히 먹어야 되는데” 막내딸이 뒤늦게 알려주니 민망하고 또 속상했다. 며느리들이 ‘이제 시어매가 밥도 제대로 못 드신다’ 하고 걱정하지는 않을까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서 “내가 딴 생각을 하다가….” 하며 공연히 군소리를 늘어놓으셨다.

막내딸 집에서 조촐하게 이루어진 촛불도 없는 생일파티, 심지어 꼬깔모자마저 빠뜨려 임시방편으로 윤지의 코끼리 세안밴드를 쓰고 있는 호랑님. /김윤지
막내딸 집에서 조촐하게 이루어진 촛불도 없는 생일파티, 심지어 꼬깔모자마저 빠뜨려 임시방편으로 윤지의 코끼리 세안밴드를 쓰고 있는 호랑님. /김윤지

잔치가 끝날 무렵, 헤어지기가 아쉬운 호랑님은 어디 가서 입이나 다시고 가라고 자식들을 붙잡았다. 얼굴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게 발걸음을 옮겼는데, 자식들은 이미 몰래 준비해둔 게 있었다. 윤지네 집에 도착하자 며느리들이 주섬주섬 케이크를 꺼냈다.

“어무이 좋아하시는 복숭아 맛이에요”

문제는 촛불이었다. 막내네는 밥도 안 해먹는지 가스가 없어서(막내집은 인덕션을 쓴다.) 불을 붙일 수 없어 결국 노래만 부르고 웃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였으랴.

윤지는 부지런히 사진을 찍어두더니, 다들 돌아가고 나서는 뭔가를 내밀었다.

“할머니, 저희는 휴대전화로 다 사진을 보지만, 할머니는 잘 못 보시니까 사진으로 뽑았어요. 심심하실 때마다 보세요. 큰 외삼촌(큰아들)은 곧 한국 오신다니까 그때까지는 이 사진 보면서 참으세요.”

호랑님은 케이크보다도, 딤섬보다도, 사진 속 큰아들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셨다. 사진에는 멀리 있는 큰아들이 웃고 있었고, 아직 말도 서툰 증손주가 옹알이를 하는 모습도 담겨 있었다. 사진 속 눈빛이 낯익고 정겹게 다가왔다.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큰아들의 어린 시절 얼굴이 겹쳐 보였다.

아침식사 후 매일 증손주 태빈의 돌잔치 사진을 보며 어쩜 저렇게 예쁠꼬~하시는 호랑님. /김윤지
아침식사 후 매일 증손주 태빈의 돌잔치 사진을 보며 어쩜 저렇게 예쁠꼬~하시는 호랑님. /김윤지

반들반들한 사진 종이를 손끝으로 쓰다듬다 보니, 마치 멀리 있는 우리 아기를 직접 안아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진 한 장을 만지는 일인데도 따뜻한 체온이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았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아들의 얼굴도, 보고 싶은 손주의 눈망울도 종이 위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참, 기술 좋다. 옛날에는 명절에나 한 번 얼굴 보는 게 일이었는디….” 호랑님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 말끝에는 쓸쓸함과 고마움이 동시에 묻어 있었다. 이 나이 먹도록 살아서 뭐하나 맨날 입버릇처럼 말을 해도 이때까지 살아있으니 이런 걸 보는구나 싶다.

산중호걸 같던 호랑이도 세월 앞에 기력은 쇠했지만, 여전히 밥상에서 바라는 건 음식이 아니라 가족의 얼굴이었다. 산중호걸 호랑이는 이제 맛있는 반찬보다 자식들 얼굴 한 번 보는 게 더 중요하다. 물론 자식들도 밥 벌어먹고 사느라 힘들어서 못 오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자식들 얼굴 한 번 더 보고 싶다. 호랑이가 이번 생일에도, 또 다음 생일에도 바라는 건 결국 그것 하나뿐이다.

김윤지
김윤지

/김윤지 하동군청 근무

※ 필자소개 (얼떨결에 담담하고 소박한 이야기를 쓰게 되었지만 속은 아주 기름지답니다. 간혹 글에 누런 기름이 뜨더라도 페이퍼타월처럼 저를 감싸주시고 닦아주시길 바랍니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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