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어른, 생각 한 줌> 인생 각본의 행간 채우는 유아기

"마음만 코끼리여도 되냐" 묻자
아이들 "끼리, 끼리" 외쳐 화답
조건 없는 배려ㆍ다양성 배워

개성을 잃어가는 현대 사회
경쟁 멈추고 공존 가르쳐야
자기 색깔로 빛나는 세상 돼

무대 한쪽이 스르르 열린다. 침묵을 걷어낸 화려한 조명이 쏟아지고 코끼리들이 뚜벅뚜벅 걸어 나온다. '논다는 것은' 신명이 올라와 둥둥둥 북소리를 낸다는 것. 크고 작은 코끼리 엉덩이가 겹치고 느리거나 빠른 리듬을 탄다. 어떤 녀석은 마음 급한지 발자국 리듬을 높이면서 걸어온다. 복슬복슬한 코끼리, 홀쭉한 코끼리와 뒤뚱뒤뚱한 코끼리들이 각자 다른 생김새와 움직임으로 한바탕 춤추고 받아들이고 내지르면서 어우러진다. 하나의 생태계처럼 놀이마당을 휘젓고 다닌다.

코기리 놀이를 하는 아이들. /박영희
코기리 놀이를 하는 아이들. /박영희

그때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린다. "저! 마음만 코끼리여도 되나요?" 망설임 가득한 두 눈과 머리에는 코끼리 모자가 덩그러니 얹혀 있다. 호기심 그릇에 무엇을 담으려는지 눈망울은 크고 진지하다. 육중한 몸짓을 흉내 내는 코끼리들이 다양한 개성과 색깔로 착 달라붙었다가 떨어진다. 우~ 친구들의 환호가 터진다. "마음만 있어도 코끼리, 끼리끼리 코끼리!" "우리 모두 코끼리, 코 코 코끼리!" 아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다가 환하게 피어난다. 귀가 작은 코끼리는 귀엽고 코가 짧은 코끼리는 넉살스럽고 다리가 긴 코끼리는 새침데기로 눈을 홀린다. 어색한 듯하면서 잘 어울리는 코끼리 모자를 쓴 아이까지 그들은 리듬을 태우고 춤추고 박수로 흥을 돋운다. 모자 위에 달린 빨간 코가 휘청대며 흔들린다. 그렇게 우리는 오순도순 가족 코끼리가 되었다. 

아이들과 손을 맞잡고 코끼리 코를 만들어 한바탕 질펀하게 놀았다. 손등이 닿자 깔깔거렸고, 움찔하던 어깨가 천천히 풀어진다. 아이들은 눈빛과 몸짓과 발끝으로 말을 걸면서 웃음꽃을 피운다. 어떤 아이는 팔을 위로 둥글게 말아 머리 위 코를 만든다. 또 어떤 아이는 쭈그려 앉아 동그란 배를 흔들며 코끼리 흉내를 낸다. 키 작은 친구 앞에 선 아이는 살짝 무릎을 굽혀 살가운 눈을 맞춘다. 등 뒤에서 슬쩍 밀어붙이는 아이는 앙증맞고 앞서 가다 뒤돌아보면서 친구를 기다리는 아이는 연민이 고인 아이다. 팔짱을 끼고 리듬을 맞추는 아이들은 신나는 놀이터로 마실 나온 아이다.

노래가 빨라지면 낄낄 웃고 느려지면 "천천히"로 말하면서 친구의 속도를 살핀다. 서툰 움직임은 '배려'로 채운다. 그러니까 동심만 있어도 배가 부른 아이들이다. 마무리는 양팔을 앞으로 쭉 뻗어 서로 등을 감싸고 몸의 언어로 포옹한다. 무언은 눈빛으로 말한다. '너도 괜찮아', '우린 함께야'라는 진한 마음이 그윽해진다. 

아이들과 허아성 작가의  <끼리 끼리 코끼리> 그림책을 읽고 호흡하고 흔들흔들 웃어가면서 '우리 함께'라는 공동체를 일군다. 아이들이 꾸미고 만들어 내는 특별한 관계의 언어는 '포옹'이다. 아이 한 명은 질문하고 다른 아이들은 마음에 담아둔 생각을 내민다. 이는 유아기 정서 발달의 핵심인 '애착'이 관계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아이들에게 낯섦은 어른들의 두려움과 달리 호기심이다. 그럴 때 자신감이 올라오고 타인을 존중하며 안전한 둥지 집을 짓는다.

나무에 열린 열매를 신기한 듯 바라보는 아이들. /박영희
나무에 열린 열매를 신기한 듯 바라보는 아이들. /박영희

포옹은 마음이 번진 언어가 고결한 심성을 빚어내는 연금술이다. "나도 괜찮아, 너도 괜찮아", "우리 모두 괜찮아.", "우리는 함께 할 수 있어." 긍정 마인드를 창출하고 조건을 달지 않는 선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감정이입이다. 

'교류분석상담이론'으로 들어가 보면, "마음만 코끼리여도 되나요?"라는 질문은 아이의 어린 자아(Child ego)에서 온 감정 표현이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이다. "끼리끼리 코끼리!"라고 외친 친구들의 화답은 부모 자아(Parent ego)의 조건 없는 수용과 어른 자아(Adult ego)의 판단으로 감정과 현실의 균형이 함께 하는 교류이다. 아이들은 몸으로 긍정적인 스트로크를 주고받으면서 서로 인정하고 연결하는 감각을 내면화한다. 

유아기의 경험은 인생 각본의 행간을 채운다. "나는 다르지만 괜찮아.", "나도 함께할 수 있어." 무대 위에서의 아이들은 그들만의 작고 강한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그것은 놀이와 성격을 달리한다. 서로 껴안고 속도를 맞추고 기다려 주는 사이 유아기의 성장판이 열리고 사회적 구성원으로서의 역량이 자란다. 공감과 배려, 자율성과 소속감은 다름을 존중하면서 살아가는 공존의 감각을 체화시킨다. 

각각 다른 색깔을 지닌 코끼리들이 무리 지어 살아가는 세상이 행복한 세상이다. 공동체는 선과 악을 구분 짓지 않는다. 여름 숲 속을 들여다보면 나무마다 다른 잎사귀로 어울리고 햇살을 제각각 초록 물로 숲을 덮고 빛난다. 그럼에도, 개별적 존재로 살아간다. 들판에는 풀들이 군락을 이루지만 풀 한 포기의 영역은 존엄하다. 서로 다른 뭇 생명이 여름이라는 무대에서 함께 비빌 언덕에 기댄다. 

하지만, 최근 기후변화와 서식지 파괴는 지구별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든다. 무분별한 외래 생물종의 유입으로 다양성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생태계가 균형을 잃으면 함께 살아가는 생명도 위협받는다. 벌과 나비는 서로 다른 꽃을 찾아다니며 생태계를 순환시킨다. 다양성을 잃으면 자연의 질서가 깨지고 인간 사회도 아이들의 마음도 균형을 잃는다. 교실이라는 어울림 생태계는 아이가 주인공이다. 아이 한 명 한 명이 고유하게 존재할 수 있도록 간섭과 경쟁과 차별을 멈추어야 한다.

꽃을 만지며 노는 아이들. /박영희
꽃을 만지며 노는 아이들. /박영희

아이들이 가정이나 교실에서 다양성을 먹고 자라도록 아이들 눈높이를 수평으로 바라보고 재단해야 한다. 세계 여러 나라 사람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다른 옷을 입은 친구에게 인사하는 것, 피부색이 다른 친구와 손잡고 노는 것, 거창한 학습이 아니어도 작은 행동에서 만족하는 아이는 풍성한 아이로 자랄 개연성이 그만큼 높다. 다르다는 것은 개성으로 무장한 '공존'이면서 '특별함'이다. 다름은 다양성 교육의 출발점이다. 아이의 미래를 담보하는 '지속가능발전교육'도 이 범주에 속한다. 

아이들은 관계 속에서 경험을 먹고 자란다. 무대 위에서 싹튼 공동체 감각은 협력적 소통 역량과 공동체 역량을 키우는 산교육이다. 아이들은 코끼리 무리 속에서 '다름'을 껴안았고, '함께'를 선택했고, '공존'이 왜 기쁜지를 알았을 것이다.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해 가면서 누군가를 마주할 때, 이번에 경험한 포옹처럼 따뜻한 손을 먼저 내밀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코끼리가 되었고, 진짜 '우리'가 되었다.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날 수 있는 것은 '다름'이 손을 내밀 때 가능하다. 각자가 존중받는 교실, 자기 색깔로 빛나는 아이들, 그 시작은 다양성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우리 사회의 건강한 마음의 토양에서 뿌리를 내린다.

 /박영희 국공립장유어린이집 원장

☞ 필자는… 아이, 교사, 부모의 세계를 잇고 유보통합을 선도하는 '영유아학교 시범기관' 국공립어린이집의 원장이자, 교육학 박사입니다. 어려움과 관계의 갈등을 함께 마주하며, 따뜻한 마음으로 성장과 배움의 기쁨을 나누는 전문상담사입니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키워드
#경남

잠깐! 7초만 투자해주세요.

경남도민일보가 뉴스레터 '보이소'를 발행합니다. 매일 아침 7시 30분 찾아뵙습니다.
이름과 이메일만 입력해주세요. 중요한 뉴스를 엄선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

뉴스레터 발송을 위한 최소한의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이용합니다. 수집된 정보는 발송 외 다른 목적으로 이용되지 않으며, 서비스가 종료되거나 구독을 해지할 경우 즉시 파기됩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