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정부 추가경정예산안이 확정됐다. 곧 민생회복 소비쿠폰이 지급되고, 개인이나 소상공인의 묵은 빚이 탕감될 예정이다. 그런데 때마다 그랬듯이 이번에도 빚 탕감을 놓고 형평에 맞지 않다거나, 도덕적 해이가 걱정된다는 소리가 사라지지 않는다.
역사는 이를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고대 히브리에는 묵은 빚을 없애주는 희년(禧年·jubilee)이 있었다. 서민층을 옥죄는 오랜 빚을 탕감해줌으로써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고, 궁극적으로는 사회 전체가 붕괴하는 것을 막는 조치였다.
구약성서 신명기에는 이렇게 씌어있다. "너희는 일곱 해마다 빚을 탕감해주어야 한다. 탕감에 대한 규정은 이러하다. 이웃에게 빚을 준 모든 사람은 자기가 꾸어준 것을 탕감해주어야 한다. 주님의 탕감령이 선포되었으므로 자기 이웃이나 동족에게 독촉해서는 안 된다."
신명기에는 또 높은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고리대(高利貸)'를 금지하는 율법도 있는데, 이는 자선을 강조하는 행위로 이어진다. 현실적으로 고리대가 오가는 상업계약을 파악하는 일이 어려웠기 때문에, 전통주의자들은 그 대안으로 "빈자를 보살필 부자의 자선의무"를 부르짖게 된다.
그런가 하면 고대 아테네 정치 지도자 솔론은 세이사크테이아, 즉 '무거운 짐 털어내기'라는 이름 아래 빚을 탕감하고 채무 노예를 폐지하며 땅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파격적인 정책을 시행했다.
일반화하기 어려운 사례라고 반문할 수 있으나, 분명한 것은 빚 탕감과 자선 문화가 고대 히브리와 아테네 사회를 건강하게 뒷받침했다는 사실이다.
역사가 증명하는 빚 탕감과 자선, 강자와 약자가 공존할 수 있는 이 방안에 현실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우리가 인색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더불어 사는 삶을 뒤로한 채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기계적 공정(公正)'에 함몰된 탓은 아닐까?
/구주모 경남도민일보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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