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너리댁의 밥상> 여름 맛
매자골 텃밭에 심어둔 소풀
한 움큼 베어내니 아릿한 향
개발·방아잎 넣고 반죽 휘휘
노르스름하게 익어가는 소리
한 조각 먹은 손녀 연신 감탄
혀를 쏘는 듯한 여름 맛이 난다. 노지에서 키운 소풀(정구지, 부추)과 독이 바짝 오른 땡초를 씹으면 콧등에 땀이 맺히는 맛이다. 할머니와 내가 마주 보고 앉은 밥상에 할머니 표 찌짐이 올라오면 그때부터 여름이 시작된다.
매자골 텃밭에 심어둔 소풀은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아주 기특한 놈이다. 지난주 미현이네 집에 갈 때 빈손으로 가기가 그래서 한 소쿠리 베어서 검은 봉다리에 싸서 갔었는데 그새 또 빼곡하게 자랐다. 밭에 꽂아둔 칼을 잡고 이번에도 한 움큼씩 베어내니 아릿한 향이 느껴진다. 지난주보다 향이 더 진해진 것 같은 느낌에 징그러운 여름이 또다시 왔나 보다고 생각한다.
장화로 터벅터벅 소리 내며 집으로 돌아와 모자를 벗고 바로 쭉담에 앉아서 티와 점 잎(누렇게 변한 잎)을 가려낸다. 아직은 날이 가물지 않아서 그런지 점 잎도 별로 없고 베어온 풀을 온전히 다 먹을 수 있겠다. 고새 다시 뻣뻣해진 다리를 천천히 움직이며 세 발자국 옆에 있는 세숫가로 가 찬물에 소풀을 여러 번 씻는다. 물에 찰랑찰랑 흔들리는 소풀을 보니 덩달아 시원한 기분이 든다. 씻은 소풀에 물기가 빠질 때까지 구멍이 송송 난 바구니에 담아 채를 받쳐 두고는 잔너리댁도 목욕하러 화장실로 들어간다.
비누 향 폴폴 풍기며 꼬실꼬실한 파마머리로 화장실에 나와서는 곧장 정지(주방)로 향한다. 물 한 컵으로 갈증까지 해소하고 나면 냉장고를 뒤적이며 저번 진교장에서 산 개발(조개류를 일컫는 말)들을 찾는다. '내가 분명히 여기에 뒀을낀데…. 참 이상타...'하며 냉동실로 고개가 점점 들어가더니 냉동실 두 번째 칸 맨 안쪽에서 손질된 담치와 바지락이 들어있는 봉다리를 하나 집으니 고개가 다시 나온다. 생각보다 꽝꽝 언 뭉치에 내일 오전까지 녹기를 바라며 봉다리에 그릇을 받쳐 김치냉장고로 옮겨놓는다.
초저녁부터 홉씬 누워 잤더니 기어코 또 새벽에 잠에서 깼다. 보건소에서 알려준 발목 까딱까딱 운동을 하나 둘…. 서른까지 세고도 다시 잠이 안 들어 이불을 걷어내고 정지에 들어간다. 소풀을 만져보니 물기 하나 없이 부드럽다. 소쿠리에 있는 소풀을 조금씩 꺼내서 집게손가락 한 마디 크기로 쫑쫑 썰어준다. 도마 꺼낸 김에 방아도 같이 썰어놓으면 좋을 텐데 한밤중에 마당에 심어놓은 방아를 뜯어오기가 무서워 대충 정리를 해두고 다시 침대에 눕는다. 하나 둘 셋…. 속삭이며 숫자를 세다가 백이 넘어가면 자꾸 잊어버려 세 번째 아흔일곱까지 세고 나서는 다시 잠에 든다.
아침에 일어나서 윤지 출근 준비를 시키고 차 타고 나가는 윤지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나서 다시 돌아와 집을 치운다. 아기 때부터 한쪽 팔에 인형 하나씩 양옆으로 끼고 자는 잠버릇이 안 고쳐진 것인지 윤지 방에는 오늘도 베개와 인형들이 널브러진 채 있었다. 매번 정리하지도 않으면서 밖에 나갈 때는 향수까지 뿌리고 나가는 윤지가 '저래서 시집이나 갈까?'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오늘도 잔소리 없이 이불과 인형들을 가지런히 정리해둔다.
텔레비전에 전을 부쳐서 맛있게 먹는 사람들을 쳐다보다 잊고 있던 계획이 생각났다. '문디, 나이가 들면 좋은 게 하나 없어. 이거 하나도 고새 이자삔다.'라고 혼자 푸념을 늘어놓으며 이제는 해가 훤히 비치는 마당으로 나가 방아잎 몇 개를 따서 들어온다. 새벽에 대충 정리해놓은 도마에 방아잎과 엊그제 따온 땡초도 대여섯 개 썰어주고 김치냉장고에 있던 개발 봉다리도 꺼내서 끌러낸다(매듭을 푼다). 다행히 적당히 녹은 개발을 도마 위로 올려서 탕탕 쪼사내는 것을 끝으로 큰 다라이에 먹기 좋게 손질된 재료들을 한 번에 쏟아붓는다. 아래 찬장에서 밀가루를 꺼내 다라이에 들어 있는 재료가 절반 정도 보일 때까지 부어준다. 그다음 살짝 되직할 정도로 물을 넣어 반죽을 휘휘 저어준다. 반죽이 제대로 섞일 때쯤 어간장(작년에 담아둔 멸치젓갈을 체에 밭쳐 맬금한(맑은) 간장)을 찔끔 넣어 간을 해준다. 내 입에는 딱 맞아도 윤지가 짜다고 하면 안 되니 넣고 싶은 양의 절반만 넣었더니 색깔이 영 시원찮아 한 번 더 찔끔 부어준다. 윤지가 퇴근하고 올 때까지 반죽을 비닐로 덮어서 냉장고에 재워둔다.
시계가 6을 만들면 이제 윤지가 올 시간이 다 되었으니 마을 회관 나무 앞에 앉아 하염없이 도롯가만 쳐다본다. 6시 23분, 흰 차가 우리 동네로 들어오는 걸 보니 윤지가 확실하다. 차에서 내리는 윤지를 맞이하고 집으로 들어가 서둘러 냉장고에 있던 반죽 다라이를 꺼내 장갑을 끼고 손으로 치대준다. 국자로만 섞으면 간이 안 배어들어 개미(깊은맛) 없으니 몇 번 문때고 나서 프라이팬에 기름을 붓고 달궈서 크게 한 국자 올려둔다.
지글지글 가장자리부터 노르스름하게 익어가는 찌짐 소리에 윤지가 배고프다고 호들갑을 떨며 지나간 5월 달력을 뜯어 소쿠리에 올려둔다. 뚝딱 한 장 구워서 준비해둔 달력 위에 올려두고 어서 뜯어 먹어보라고 하니 윤지가 젓가락을 양쪽으로 잡고 쭉 뜯고 호호 불어서 내한테 한 입 먼저 먹여준다. 쌍긋한 방아잎 향에 어간장 간까지 딱 맞는 것 같아 만족스러운 맛이다. 내 입에 쏙 넣어주고 또 한 조각 뜯어서 먹은 윤지도 연신 맛있다며 얼른 더 달라고 한다.
먹는 것보다 부치는 게 더 빨라질 때쯤 윤지가 거실에 밥상을 펴고 영감 제사 때 쓰고 남은 막걸리와 사이다 한 병을 꺼내 상 옆에 둔다. 다시 정지로 들어와서 젓가락을 챙기던 윤지가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는 내한테 '할머니 이제 그만 부쳐. 이건 그때그때 해서 먹어야 맛있단 말이야~' 라고 하며 어서 먹자고 재촉을 한다. 그래도 이거 부쳐놓으면 동네 사람들도 좋아하니 한 장씩 갈라줄 요량으로 반죽 두 국자 더 떠서 부치고 나서 밥상에 앉는다. 윤지가 막걸리에 사이다를 섞어 준 컵을 받아들고 한 모금 넘기니 시원하고 맛있어 한숨에 꼴깍 다 마셔버렸다. 갑자기 땡초를 제대로 씹었다고 오른쪽 뒤 혀를 톡톡 때리고 진한 풋내가 나는 것이 땡초인게 분명하다며 우스갯소리를 하는 윤지 덕분에 웃음이 났다.
뒤돌아서면 온갖 것들이 한 뼘씩 자라기에 고되었던 기억밖에 없는 이 계절을 그래도 버틸 수 있는 건 이 쌍긋한 아린 맛 때문이다.

/김윤지 하동군청 근무
(※ 필자소개 얼떨결에 담담하고 소박한 이야기를 쓰게 되었지만 속은 아주 기름지답니다. 간혹 글에 누런 기름이 뜨더라도 페이퍼타월처럼 저를 감싸주시고 닦아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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