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너리댁의 밥상> 시큼달달한 맛|
제삿날 세어보고 또 세어보고
그리워 공원묘지로 향했지만
힘들어 양조장서 발걸음 멈춰
영감 생각나 샀다고 말 못하고
손녀와 함께 막걸리만 홀짝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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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보름이니까 다음주면…. 잔너리댁은 요즘 혼잣말이 늘었다, 아침에도 윤지를 깨워놓고 거실에 있는 달력을 보며 영감 제사가 얼마나 남았는지를 세어보고 있던 참이었다. 옷매무새를 다듬던 윤지가 힐끔 할머니를 보더니 "할머니, 어제도 달력 보고 날짜 확인하셨잖아. 그럼 당연히 오늘은 어제 날짜 더하기 일이지."라고 말을 한다. 윤지 말대로 아침마다 달력을 빤히 쳐다보며 날짜를 세는 것도 보름째이다. 그런데 이렇게 확인해도 오후쯤이면 또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아리송송해서 참 큰일이다. 잔너리댁은 당신이 이 나이까지 살더니 까딱하면 영감 제사도 잊어버릴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니 윤지가 이해 못 하겠다는 듯이 말해도 달력을 매일, 생각날 때마다 보고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영감 제사도 못 챙기면 저승 가서 우째 영감 얼굴을 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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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오늘은 이제 9일 남았네.' 오늘도 아침에 윤지를 깨우고 똑같이 달력을 확인한다. 이제는 윤지도 익숙한지 잔너리댁이 확인차 물어보는 질문에 건성으로 대답한다. '응, 할머니 다음 주면 다들 모이겠네~'
도성이 아부지 제사에 모일 우리 아들들을 생각하다 보니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다. 다들 잘 먹는 고사리나물이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급히 꽃무늬 몸빼, 꽃무늬 모자를 쓰고 체크무늬 장화에 발을 넣으면서 "지야, 할매 고사리 끊으러 갈 끼니게 챙기서 가그라이~"라고 말을 한다. 오늘 오후에 비도 온다고 해서 마음이 급한데 성치 않은 무릎이 말을 듣지 않아 터벅터벅 장화만 앞서가는 느낌이 든다. 밭은 숨을 몰아쉬며 서주골 밭을 올라가니 새벽에 찔끔 온 비 때문인지 고사리들이 손을 삐쭉 들고 있다. 이걸로는 영감 제사상에 올리고 며느리들도 주기엔 좀 모자란 것 같지만 내일도 올라갈 요량으로 보이는 고사리만 한 움큼 끊어서 내려온다. 솥에서 고사리를 삶고 쭉담(뜰)에 한 가닥씩 펼쳐서 말린다. 퇴근하고 온 윤지는 대문을 열고 들어서며 "윽, 고사리 냄새!"라고 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지야, 그래도 하라시 제사상에 고사리 너물 올려야 한께네 조금만 참아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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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야, 일어나그라~ 했더니 윤지가 눈도 뜨지 못한 채, 할머니 오늘은 8일 남았어요! 그리고 오늘은 보건소에 약 타러 가야 하니까 고사리밭에 가지 마시고요~ 라고 한다. 뜻밖의 대답에 귀엽고 기특해서 깔깔 웃었더니 앞으로는 자기가 알려주겠다고 한다. 오늘도 꽃무늬 옷에 체크무늬 장화를 신고 서주골로 올라갈 채비를 하던 잔너리댁은 윤지 덕분에 제날짜에 보건소를 갈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수요일에만 의사 선생님이 있기 때문에 요일을 놓치면 다음 주까지 약을 못 받으니 난감한 상황을 윤지덕분에 모면한 셈이다. 보건소 문은 9시에 열 테지만 잔너리댁은 윤지 출근을 배웅하고 8시 30분쯤에 살살 걸어서 보건소에 간다. 수요일에 의사 선생님께 진료를 받으려고 온 마을에서 사람들이 오니 조금이라도 일찍 가야 덜 기다리기 때문이다. 다행히 오늘은 사람이 별로 없어서 기다리지 않고 혈압약을 타 올 수 있었다.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가 어제 꺾던 고사리를 마저 꺾으려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문득 영감 생각이 났다. 영감 세상 베리고 보니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나서 딱 두 번만 갔던 영감의 무덤이 갑자기 보고 싶었다. 어차피 성치 않은 다리로는 영감이 있는 공원묘지에도 올라갈 수 없겠지만 발길이 이끄는 대로 집과 반대 방향인 공원묘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공원묘지 올라가기 전에 있는 양조장 고전 막걸리 앞에서 서성이며 영감 생각을 하고 있으니 지나가던 옆 동네 할매가 거기서 뭐 하냐고 말을 건다. 이 나이에 영감이 그리워서 그렇다고 말하기가 남세스러워 막걸리가 묵고 싶어서 한 병 사러 왔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졸지에 2500원 고전 막걸리를 한 병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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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이틀 고사리 장만하는 데에 힘을 썼더니 어깨와 무릎이 쑤셔서 잔너리댁은 오늘은 쉴 참이다. 윤지를 보내놓고 다시 누워서 이제 일주일 남았으니, 생선은 언제 장만하고 과일은 어떻게 할지 머릿속으로 상상하다 보니 또다시 영감 생각이 났다. 무릎만 성했다면 어떻게든 올라가서 한 번 보고 올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 힘으로 공원묘지까지 가는 건 무리다. 하지만, 자식들 차를 타고 같이 가서 아부지 무덤 앞에서 엄마가 우는 걸 어찌 보여주랴. 잔너리댁은 가고 싶어도 보고 싶어도 할 수 없어진 늙어버린 몸을 생각하니 세월이 원망스러워 베개에 눈물 몇 방울을 떨어트렸다. 속이 상해서 점심도 거르고 누워있었더니 벌써 오후가 되었다. 매일 방천길을 걸으며 같이 운동하는 부산댁이 찾아와 성님, 오늘은 운동 안 할낍니꺼? 라고 마당에서 물어왔다. 잔너리댁은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지만, 부산댁이 찾아와준 것이 고마워서 운동화를 신고 함께 방천길을 향해 걸어갔다. 방천을 따라 쭉 걷다 보니 또 고전 막걸리가 보였다. 시큼달달한 냄새를 맡자 잔너리댁은 어제 그곳에서 서성이던 생각이 나 눈물이 고였지만 아무 내색하지 않고 막걸리 한 병만 사서 가자고 부산댁에게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부산댁은 '이제 더워지는가 보다. 우리 성님 더우면 물 대신 막걸리에 사이다 타서 먹는데 벌써 덥습니꺼?'라고 장난스럽게 물어왔다. 잔너리댁은 사실 영감이 보고 싶어서 그나마 영감이랑 제일 가까운 양조장에 찾아갔다고 말하기엔 너무 부끄러웠는데 차라리 잘 됐다 싶어 부산댁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막걸리 한 병을 또 손에 쥐고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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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아침에 산책 삼아 고전양조장을 다녀왔으니 벌써 냉장고에 막걸리가 세 병이 나 쌓였다. 주말이라 늦잠을 자고 일어난 윤지가 냉장고를 열어보더니 웬 술이 이렇게 많냐며 물었다. 잔너리댁은 윤지에게도 할아버지 생각이 나 그 앞을 서성이다가 한 병씩 사 왔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요즘 밭에 갔다 오면 목이 말라서 한 잔씩 먹으려고 사다 놨다고 말했다. 그러자 윤지가 입맛을 다시며 먹어도 되느냐고 되물었다. 잔너리댁은 막걸리는 오래 두면 안 좋으니 어제 아래 사 온 막걸리부터 차례대로 먹으면 좋겠다 싶어 윤지 한 잔을 따라주고 당신도 반 잔을 따라서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지난 이틀간 양조장에서 맡은 냄새랑 똑같은 맛이 쑥 들어왔다. 시큼달달하면서도 목구멍을 살짝 톡 치는 맛. 잔너리댁은 어쩐지 이것이 자신의 모습 같았다. 너무 익어 시큼하면서도 마음은 아직 잘 익은 채 보존된, 그래서 목구멍이 아리듯 눈물이 나는 맛. 잔너리댁은 영감 보고 싶은 마음을 주름 사이사이에 잘 숨기느라 아무도 자신의 그리움을 몰라주는 것 같아 갑자기 속상해졌다. 하지만, 이 또한 막걸리 때문일 거라며 주름 속에 숨기고 잔너리댁은 취기에 눈을 감고 있었다.
/김윤지 하동군청 근무
(※ 필자소개 얼떨결에 담담하고 소박한 이야기를 쓰게 되었지만 속은 아주 기름지답니다. 간혹 글에 누런 기름이 뜨더라도 페이퍼타월처럼 저를 감싸주시고 닦아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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