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어른, 생각 한 줌]
봄은 연초록 입들이 빗방울 받아먹는 계절
그림책 펼치자 귀 쫑긋 세워
애벌레 따라 과일 먹는 시늉
배탈 난 모습보고 아픔 함께
매달 그림책 정해 놀이 진행
종이 색칠해 드레스 만들기도
노는 동안 생각 골짜기 깊어져
4월은 살랑한 바람이 연초록을 응원하는 계절이다. 햇살이 나무 사이를 부드럽게 파고들고 새들은 목청껏 지저귄다. 꾸물꾸물, 꿈틀꿈틀, 꼬물꼬물 몸을 비틀고 간지럼 태우는 애벌레 한 마리를 무릎 위에 살짝 올렸다. 이 광경을 지켜본 아이들의 반짝거리는 눈망울이 모여든다. 에릭 칼의 <아주아주 배고픈 애벌레>그림책의 첫 장을 넘기니 노랑, 파랑, 초록, 빨강 여러 색깔이 퍼즐처럼 널리어 있다. 각각의 색깔 속 동그라미는 줄지어놓은 듯 나란히 걸어간다. 호기심이 호기심을 낳는 아이들도 동심원을 그리며 귀를 쫑긋 세운다.
해님은 웃고 달님은 나뭇잎 위에 있는 작은 알을 지키고 있다. "나뭇잎 위에 작은 알 하나가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어요." 첫 문장을 읽자, 아이의 눈동자는 금세 달을 끌어당겨 어루만진다. 손가락이 알을 가리키는 사이 동그랗게 벌린 입은 그림책을 향해 달려온다. 아이들 동심이 열리면서 나뭇잎이 파르르 떨린다.
알에서 나온 애벌레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어느새 먹이를 찾는다.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사각사각 소리를 모은 후 배에게로 눈길을 보낸다." 한 아이가 '사과'하며 입속으로 손을 넣는 시늉을 한다. 오렌지를 먹은 금요일에는 눈을 찡그리면서 입을 오물거렸더니 입안에 침샘이 고인다. 나도 모르게 꿀꺽 소리 내며 책장을 넘긴다. "토요일에 애벌레는 초콜릿 케이크랑 아이스크림을 먹었어요"라고 말하기 전에 벌써 두세 명 아이들이 쪼르르 그림책 앞으로 눈동자를 굴린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나는 케이크, 나는 막대 사탕, 아이스크림, 수박 등등을" 먹었던 기억들이 입으로 톡톡 터진 이야기보따리가 풀리면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배탈이 난 애벌레를 보면서 "아야~아야" 하면서 자신의 배를 만진다. 마법 같은 아이들의 손은 단순한 흉내가 아니라 진심이다. 자기 신체에서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는 몸짓이다. 애벌레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눈으로 표현한다. 애벌레의 고통에 반응하고, 고통을 나누는 정서적 공감을 형성한다.
언어표현이 서투른 두 살배기 아이들의 감정이입은 생각에 앞선 행동에서 나온다. 자신의 손으로 어루만지고 받아들이는 행동이야말로 교감의 염원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는 신호다. 식성 좋은 애벌레가 컵케이크, 소시지 등을 마구 먹고 배탈이 났고, 초록 잎사귀를 맛있게 깔아 먹은 후에 스스로 자연치유가 되는 것이 생태계의 질서다. 이를 지켜보는 아이들의 시선이 관찰로 이어지면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고 친사회적 행동이 늘어난다.
애벌레가 고치 속에서 쏙 빠져나와 나비가 되었을 때 "우와! 우와" 손뼉을 치는 아이들과 "나비야! 나비야" 노래를 부르는 선생님과 "나도 나비다!"라면서 두 팔 벌려 환호하고 함께 날았다. 덩실덩실 춤추는 봄바람도 나비의 변신을 축하하고 있다. 응원가를 불러주는 아이들이 보란 듯이 그림책 속 나비는 훨훨 날아다닌다. 아이들의 신체 놀이가 절정기의 곤충처럼 그림책에다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어린이집에서는 매달 연령에 맞는 그림책을 선정해서 놀이로 풀어내는 '문꼬미'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문학 + 꼬마 + 미(美)' 작은 감성 문학이 자라나고 있다. 최향랑 작가의 <숲 속 재봉사의 꽃잎 드레스> 그림책을 들고 4세 아이들을 만나러 마루 반에 들어서자, "원장 선생님!" 하고 외치며 쪼르르 달려와 품에 안긴다. 손에 든 연두색 꽃잎으로 장식된 겉표지를 바라보며 "예쁘다."라는 아이들의 입에서는 말간 꽃이 피어난다. "드르륵, 드르륵" 재봉틀 기워내는 소리와 색실을 감아 장식하는 작가의 섬세한 손길이 마치 숲 속 오케스트라처럼 교실을 향기로 채운다.
<숲 속 재봉사의 꽃잎 드레스> 그림책을 읽고 아이들과 함께 직접 드레스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부드러운 핸드타월에다 파스텔을 들고 "나는 빨간색" "분홍색 꽃잎" "나는 멋쟁이 갈색"을 선정하고 조심조심 그리고 색을 얹혔다. 파스텔에 힘주어 칠하다가 종이가 찢어져서 울먹이는 아이에게는 하루 전 사용했던 핸드타월을 충분히 말려놓은 선생님이 "괜찮아요. 여기 많이 있어요." 너그러운 미소로 달랜다.
"선생님, 색이 울퉁불퉁해요." "야~ 물을 뿌리니까 색이 사르르 사라져요." "우~와 색깔이 춤춰요" 물이 닿자 즉각적인 반응을 관찰한 아이들의 목소리는 설레었고 신이 났다. "드레스가 살아났어요" "맞아 맞아요. 입고 싶다 그쵸" 처음에 살짝 손끝으로 물을 종이타올에 적셔보던 아이도 드레스의 색이 스르륵 번지자 입가의 미소가 환하게 펴졌다. 그림책의 장면을 기억해 낸 아이는 자신이 입고 싶은 드레스를 상상하면서 그림 그리기에 몰두한다. 스스로 만든 작품에 자긍심을 느끼고 자랑스러워한다. 아이들의 심미적 감수성과 자존감이 높아진다.
놀이가 끝난 후 다채로운 꽃잎 드레스들을 가지런히 벽면에 놓았다. 이야기꽃이 만발했다. 손으로 만지고 물과 색이 섞이는 변화과정을 감정과 연결하니 다른 친구의 감정도 보인다. 자신을 존중하는 아이들의 '자기화'는 경험에서 축적된다. 잘 노는 아이가 생각 골짜기도 깊은 법이다. 아이에게 문학은 감각이 꿈틀거리는 몸짓이다.
따뜻한 봄날이다. 애벌레의 여행과 꽃잎 드레스를 따라 걸으며 아이들의 마음을 담아낸 이야기를 언어로 엮었다. "모든 학습은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진다." 레프 비고츠키(Lev Semenovich Vygotsky)의 주장처럼 아이들은 그림책의 흐름이 반복되는 구조를 이해하고 기억한다. 배탈이 난 애벌레를 보며 "아야~아야" 하면서 자신의 배를 만지고, 나뭇잎을 먹어 치우는 애벌레가 순환 생태를 건강하게 가꾼다는 것을 안다. 물이 닿아 파스텔이 번지는 모습을 보면서 감탄을 연발하는 아이는 감각적 자극과 인지적 사고가 그림책의 상상 세계에 접목하는 문학의 온기를 느낀다.
부모들은 자녀의 '문해력'을 키우기 위한 고민이 많다. 그림책은 언어의 텍스트를 감각적으로 익히는 마술사다. 그림책 장면을 읽어내는 훈련을 반복하면 자기 언어를 재창조할 수 있다. 문해력은 글을 읽고 쓰는 것만이 아니라 관찰하고 생각하는 힘을 비축한다. 그림책 학습을 통해 논리적인 사고를 키우고 넓혀간 아이들은 자기 생각이 분명하다. 봄에는 연초록 잎들이 빗방울을 받아먹는 계절이다. 봄비를 반기는 아이들이 지금 우리 곁에 있다.
/박영희 국공립장유어린이집 원장
※필자 소개 → 아이와 선생님, 부모님과 세계를 연결하는 어린이집 원장이자 두 딸의 엄마입니다. 관계의 불편함과 힘듦으로 인해 성장하기를 멈춘 이들과 만나며, 배우기를 멈추지 않는 상담사이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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