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내란, 그리고 77년 전 제주 4.3 사건
피해 유족, 또다시 빚어진 내란 정국 규탄
"비극 되풀이 안 돼...나라 다시 바로 서야"

제주 4.3사건 진상규명·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는 진상조사 보고서에서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연계된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봉기가 있었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하게 주민들이 희생된 사건이 4.3’이라고 규정했습니다. 희생된 주민만 2만 5000명~3만 명으로 추정했습니다. 미군정 시기부터 정부수립 이후까지 무려 7년 7개월간 이어진 비극이었습니다. 제주 4.3 사건은 지난 3일 77주년을 맞았습니다. 12.3 내란을 겪고 있는 지금, 그 때를 다시 보게 됩니다.

한국전쟁 다음으로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낳은 제주 4.3 사건, 그리고 반세기 이상 시차를 두고 윤석열 전 대통령이 일으킨 12.3 불법 비상계엄. 둘의 공통점은 숫자 끝자리가 ‘3’으로 끝난다는 것만 꼽히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내란이라는 점이 같다. 77년 지나 또다시 일어난 내란으로 대통령이 파면됐다. 이런 현실에서 4.3사건이 지니는 의미는 더욱더 무겁게 다가온다. 지난 2~4일 4.3 유적지를 돌아보는 ‘제주 4.3 국내외 언론인초청 팸투어’에 참여해 그 의미를 되새겼다. 이 자리는 제주특별자치도청 4.3지원과가 주최하고 제주국제컨벤션센터가 주관했다.

4.3사건으로 어머니와 아버지, 작은 아버지를 잃은 강명옥 씨가 지난 3일 오전 제주 4.3평화공원에 조성된 작은 아버지 행방불명인 표석 앞에 서서 울고 있다. /최석환 기자 
4.3사건으로 어머니와 아버지, 작은 아버지를 잃은 강명옥 씨가 지난 3일 오전 제주 4.3평화공원에 조성된 작은 아버지 행방불명인 표석 앞에 서서 울고 있다. /최석환 기자 

◇집단학살 상징 북촌리 = 투어 첫날 맨 먼저 찾은 곳은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에 있는 ‘너븐숭이 4.3기념관’이다. 이 일대는 북촌리 집단 학살을 상징하는 곳이자, 도내 전체 두 곳뿐인 희생자 집단 묘지 가운데 한 곳이기도 하다. 너븐숭이는 제주도 말로 ‘넓은 돌밭’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자리 잡은 기념관은 북촌리 비극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949년 1월 17일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북촌리에서 자행됐다. 4.3 당시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인명 희생을 가져왔다. 북촌국민학교를 중심으로 한 동서쪽 들과 밭에서 학살이 있었고, 이날 북촌리의 마을에 있었던 불가항력의 남녀노소 400명 이상이 한날한시에 희생됐다. 명절처럼 제사를 한날한시에 지내는 북촌리에는 너븐숭이 애기무덤 등 당시의 상황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흔적이 남아있다.’

실제 성별·세대·계층 상관없이 마구잡이식 학살이 이어졌다. 이곳에 조성된 너븐숭이 애기무덤이 관련 사실을 잘 일러준다. 무덤에는 1949년 1월 17일 북촌 사건으로 희생된 어린이와 무연고자가 가매장돼 있다. 본래 어린이 무덤 있던 곳이라고도 한다. 이에 더해 4.3 희생자 무덤 20여 기가 들어섰다. 대부분 봉분 없이 평평한 형태지만, 무덤임을 알리려고 일부러 흙을 쌓아 올린 곳도 있다.

너븐숭이 애기무덤에 놓인 장난감. 이 무덤은 원래 봉분 형태가 아니었다. 무덤인 줄 모르고 밟고 지나는 사람이 많아 정비됐다. /최석환 기자 
너븐숭이 애기무덤에 놓인 장난감. 이 무덤은 원래 봉분 형태가 아니었다. 무덤인 줄 모르고 밟고 지나는 사람이 많아 정비됐다. /최석환 기자 
봉분 없는 너븐숭이 애기 무덤. 돌이 무덤을 두르고 있다. /최석환 기자
봉분 없는 너븐숭이 애기 무덤. 돌이 무덤을 두르고 있다. /최석환 기자

◇유독 제주 사람들이 몰살된 이유 = 기념관과 애기무덤을 둘러보고 나서 뒤이어 이동한 곳은 일대 추모 공간 4.3 위령비다. 이곳은 1949년 1월 17~18일 군인들에게 학살된 북촌리 주민들을 기리려고 만들어졌다. 학살당한 사람 이름이 비석에 줄줄이 적혀 있다. 올바르게 이름이 적히지 않은 사례도 있다. 일부는 고인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어 누군가의 아내, 아들이라는 글귀만 기록됐다.

이날 유적지 해설을 맡은 전영미 제주역사문화해설연구회 대표는 추모지 앞에 서서 유독 제주에서 다수가 몰살된 배경으로 과거 ‘제주 사람은 미개하다’는 사회적·역사적 인식을 지목했다.

“과거 섬사람을 무시하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외모도 미개인처럼 생기고, 옷도 흰옷이 아니라 갈옷을 입고, 거기에 언어까지 완전히 다르다고 보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런 사람들이 미군정 시책사업으로 남한 공산주의 방벽을 구축하는 것을 막고, 선거 거부까지 하니 반감이 더 컸겠죠. 한반도 전체 1%도 안 되는 ‘제주도 섬 촌것들’이라 규정하는 사회적·역사적 인식이 많은 희생을 불러오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전영미 제주역사문화해설연구회 대표가 지난 2일 오후 제주 북촌리 4.3 위령비 앞에서 유적지 해설을 하고 있다. /최석환 기자 
전영미 제주역사문화해설연구회 대표가 지난 2일 오후 제주 북촌리 4.3 위령비 앞에서 유적지 해설을 하고 있다. /최석환 기자 

◇어떤 이유로든 반복되지 말아야 할 역사 = 투어 이틀째인 3일에는 첫 일정으로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제77주년 4.3 추념식에 참석했다. 행사 개회인 오전 9시께부터 피해 유족들로 공원이 붐볐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희생자 이름이 적힌 비석 앞에 과일과 빵을 놓고 차례를 지내거나, 휴지로 먼지로 덮인 비석 속 가족 이름을 닦는 모습이 곳곳에서 있었다.

10살 때 4.3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송재봉(87) 씨는 지팡이를 내려놓고서 오른손에 물티슈를 들고 비석에 적힌 선친 이름을 연거푸 닦아냈다. 물기를 버금은 물티슈가 훑고 지나갈 때마다 ‘송춘화 38세 남, 1948년 10월 12일 사망’이라는 글귀가 또렷해졌다.

송 씨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아버지 이름인데 닦지 않는다면 그건 예의가 아닌 거고…. 추념식에 참석하는 것도 당연한 도리예요. 지금도 아픔을 떨쳐내기 어려운데 4.3이나 12.3 내란이나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일이 또 벌어졌어요. 마음이 편하지 않아요. 대통령이 자기 이익을 보려고 일으킨 계엄이었어요. 나라 꼴이 말이 아니어서 처참한 심정이에요.”

4.3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송재봉 씨가 지난 3일 오전 제주4.3평화공원에서 희생자 비석에 적힌 선친 이름을 물티슈로 닦고 있다. /최석환 기자 
4.3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송재봉 씨가 지난 3일 오전 제주4.3평화공원에서 희생자 비석에 적힌 선친 이름을 물티슈로 닦고 있다. /최석환 기자 
송재봉 씨가 지난 3일 오전 제주4.3평화공원 희생자 비석 앞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최석환 기자 
송재봉 씨가 지난 3일 오전 제주4.3평화공원 희생자 비석 앞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최석환 기자 

◇서북청년단과 닮은 극우세력 = 뒤이어 찾은 행방불명인 표석 일대에서 만난 피해 유족들도 지금의 12.3 내란에 시선을 뒀다. 이곳에는 시신을 찾을 수 없는 희생자 표석 4030기가 자리한다. 출신지 별로 보면 △제주 2122기 △경인 558기 △영남 448기 △호남 411기 △대전 270기 △예비검속 221기 등이다.

3살 때 어머니를 잃은 강명옥(81) 씨는 표석 앞에 서서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10분여간 눈물을 훔친 뒤에야 어렵게 말을 이었다. 가족을 잃은 고통이 죽을 때가 다 되어도 계속되고 있다면서, 그런 가운데 또다시 내란이 일어나다니 믿을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어머니가 3살 때 돌아가신 건 알고 있지만,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어떤 영문으로 집에 돌아오지 못했는지 지금까지 모르고 있어요. 이런 아픔을 품고 사는데 또 내란이라니요. 국민을 진정 위한다면 그래야 할 일이었을까요? 다시는 잘못된 역사가 반복되지 말아야 해요.”

4.3 사건으로 6형제 중 넷째 형을 잃은 전음송(89) 씨는 행방불명된 친형 표석을 둘러보고 나서 현재 극우세력이 서북청년단과 닮아있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자기 이익에 따라 행동한다는 점이 비슷해 보여요. 나라가 안전해야 우리 같은 사람이 다시는 나오지 않을 것 아닌가요. 모두가 국민을 위해야지 개인 이익을 보려고 해서는 안 돼요. 그리 되면 국가와 개인이 모두 망할 수밖에 없어요.”

지난 3일 오전 제주4.3평화공원 행방불명인 표석을 찾은 한 유족이 뚜껑을 딴 소주를 그릇에 붓고 있다. /최석환 기자
지난 3일 오전 제주4.3평화공원 행방불명인 표석을 찾은 한 유족이 뚜껑을 딴 소주를 그릇에 붓고 있다. /최석환 기자

◇4.3 교훈 잊지 말고 나라 바로 세워야 = 추념식 당일 오후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무등이왓 마을에서 만난 홍춘호(88) 씨는 과거 동네에서 일어난 국가권력 내란 행위를 설명하며 잘못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 씨는 그 시절 죽지 않으려고 집을 떠나 주민 100여 명과 함께 동굴에서 50여 일간 숨어지낸 바 있다.

“11살 때인 1948년 11월 어느 아침 9시 반~10시쯤 경찰관들이 집을 돌았어요. 남자들에게 연설할 게 있다고 밭에 모이라고 했어요. 일부 경찰관은 나가면 죽을 수 있으니 가지 말라고 얘기 하기도 했었는데 결국 10명이 밭에 나갔다가 총에 맞아 죽었어요. 최초 학살이 있고 나서 많은 사람이 더 죽었어요.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고 바로 세우지 않으면 잘못된 역사가 반복될 수 있어요.”

제주 4.3사건 문화해설사 홍춘호 씨가 지난 3일 오후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무등이왓 마을에서 투어 참석자들에게 지역 과거사를 설명하고 있다. /최석환 기자
제주 4.3사건 문화해설사 홍춘호 씨가 지난 3일 오후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무등이왓 마을에서 투어 참석자들에게 지역 과거사를 설명하고 있다. /최석환 기자

홍 씨는 다음 날 헌법재판소 대통령 파면 결정이 있고 나서 앞으로 국가 폭력 걱정 없이 국민이 잘살 수 있는 나라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점도 부연했다. “12월 3일 갑자기 계엄령 내려졌을 때는 한숨도 잠을 잘 수 없었어요. 서울이 불바다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누군가 죽고 말겠다는 걱정도 컸어요. 제주에 내려진 계엄령 이후 사람이 마구 죽어 나갔으니까 그때 생각이 나서 무서웠어요. 대통령이 파면될 수 있을까 싶었는데 결국 파면 결정이 나와 나도 모르게 기뻐서 손뼉을 쳤어요. 비정상적인 국가 상황이 정리돼야 해요. 내란 없이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최석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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