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겪은 자유, 자기검열로 위축
대통령 외친 '자유 한국'실체는?
아닌 밤중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드라마 같은 밤은 길었고 영화 속의 권력을 쥔 이가 더 큰 권력을 요구하고자 스스로 벌이는 친위 쿠데타 같았다. 역사에서는 독일의 프로이센 쿠데타와 장검의 밤, 일본의 2.26 사건, 중국의 4.12 쿠데타, 그리고 대한민국의 '사사오입' 개헌, 박정희의 10월 유신, 전두환의 5.17 내란 등이 그랬다.
통상적으로 친위 쿠데타는 초반에 실패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이미 그 정도 힘을 갖춘 이가 벌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 친위 쿠데타 같았던 비상계엄령은 새벽 4시가 넘어 해제되면서 실패한 듯 보인다.
포고령에는 포고령 위반자를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을 할 수 있으며, 계엄법 제14조(벌칙)에 의하여 '처단'하겠다는 무서운 내용이 담겼다.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이 제한되는 순간이었다. 표현의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는 가장 먼저 제한되고,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 침해로 이어지는 것이다.
실제로 1979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언론 검열, 집회 금지 등이 자행되어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이 심각하게 침해되었다. 그때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군인들을 실은 차가 우리 학교 운동장에 속속 도착하면서 흉흉한 소문은 꼬리를 물었다. 통금이 2시간 연장되었다더라, 위수령이 선포되었다더라, 개머리판에 머리가 깨진 학생이 실려 갔다더라, 소문은 대부분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비상계엄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폭력의 시대'였다. 창작과 표현은 검열대에 올랐고, 저항성을 잃어갔다. 독재체제에 맞서 비판의 펜을 세우기 어려웠다.
그리고 문화예술은 오랜 시간 암흑 속에 있었다. 각종 정기간행물이 폐간되고, 출판물들이 빈틈없이 조절되는 상황에서 위축되고, 위축되었다. 그렇게 깊고 긴 1970년대와 1980년대를 저항했던 예술인들은 지쳐갔다. 민주주의는 표현의 자유가 필수 불가결의 본질적 요소인데도 그 기본권리가 검열 아래 놓이면서 '게르니카'를 그린 피카소의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은 전시조차 할 수 없었고, 수많은 노래가 금지곡으로 부를 수가 없었고, 수많은 서적이 불온 딱지가 붙어 지하로 숨어들었다.
자욱하게 낀 안개가 걷히면서 검열이 해제되고 시간이 오래 흘렀지만, 그러나 그 시대를 살았던 창작하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자기검열에 시달리게 되었다. 예술 창작가들이 처벌이 두려워 정부가 문제 삼을 만한 작품을 스스로 없애기도 하면서, 아무도 강제하지 않지만, 위협을 피할 목적으로 자기 자신의 표현을 스스로 검열하는 것이었다.
완전하지 않은 형태로 존재하는 표현의 자유는 더는 자유가 아니다. 이미 자기검열을 거치는 동안 표현과 상상, 창의는 위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이 심각하게 침해되는 순간에도 우리는 섣불리 절망할 수도 없고, 계엄령이 해제되었다고 또 낙관할 수도 없다. 그가 지켜낸다는 '자유 대한민국'의 실체는 무엇일까? 이른 시일 안에 국가를 정상화하겠다는 것이 44년 전 폭력의 시대일까!
한참 잘 자고 있는데, 대통령이란 권력이 불쑥 방망이보다 큰 홍두깨를 들이대는 밤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뜻하지 않게 밤중의 친위 쿠데타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무척 두렵고 두려운 밤이었고, 시간이 지나도 이 두려움은 가시지 않는다.
/황무현 마산대학교 미디어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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