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옷 입고 고향서 친구 만나던
설렘 가득한 그 추석은 어디에…
"추석이 가까워졌습니다. 벼가 익었습니다. 밤도 익었습니다. 어머니가 새 옷을 만드십니다. 아버지가 새 신을 사 오셨습니다."
어렴풋이 기억에 남은 어릴 때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추석 명절이다. 그런데 기다림과 설렘으로 손가락 꼽아가며 기다리던 그 추석은 어디로 갔을까?
추석을 앞두고 소비가 가장 활발해지는 시기를 두고 '대목'이라고 했고, 반대로 추석 앞두고 소비가 뚝 떨어지는 현상을 '대목 전에 대목 탄다'고들 했다.
추석이 코앞이면 '단대목'인데, 예전 같지 않다. 자꾸만 간편해지고, 축소되어가고, 그래서 이러다가 추억 속에나 남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어쩌면 벌써 추석은 긴 연휴로 인식하는 시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추석(秋夕)을 글자대로 풀이하면 '가을저녁'이다. 나아가서는 가을의 달빛이 가장 좋은 밤이라는 뜻이니 달이 유난히 밝은 좋은 명절이라는 의미가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풍요를 기리는 각종 세시풍속이 있었고, 송편을 먹고 차례를 지내고, 추석맞이 노래자랑도 했었고, 또 추석맞이 가설극장도 있었다.
그 시절 시골에는 전기가 없었으니 TV는 당연히 없었던 시절, 공터에 커다란 나무기둥을 세우고서 광목으로 두른, 지붕도 없는 그 천막 극장. 돈이 없으니 영화가 시작되고 경계가 허술할 때에 천막을 비집고 들어가서 낡은 화면에서 보았던 그 호화로운 장면들.
열흘쯤 상영하면 하루이틀은 꼭 비가 왔던, 지붕도 없는 그 천막 극장이 들어오면 온 동네가 술렁였었다.
추석날 아침 차례에 올렸던 음식으로 온 가족이 음복(飮福)을 하고 산소에 성묘를 하는 행렬은 가족의 다복함을 담았었고, 미리 벌초를 마친 조상의 묘 앞에서 가족사를 전해 듣기도 하고 고향의 의미를 나누기도 했다. 그 시절 벌초를 하지 않은 무덤은 자손이 없어 임자 없는 무덤이거나 자손은 있어도 불효하여 조상의 무덤을 돌보지 않는 경우여서 남의 웃음거리가 됐다.
이제 세상이 빠르게 변하면서 명절의 풍경도 많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명절에 누리는 최고의 즐거움은 '만남'이 아닐까 싶다.
객지에 나가 있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가족들과 친척, 친구들을 만나서 정담을 나누고 회포를 푸는 만남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명절 때가 되면 표를 끊고자 진풍경이 벌어졌는데, 오죽하면 '귀성전쟁'이라 했을까. 그래도 마을 어귀까지 나와서 기다리시는 부모님과 형제들이나 친척들의 반가운 얼굴을 떠올리면 객지에서의 고생은 견딜 만했던 것이다.
한편에서, 그 많았던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래들은 또 어디로 갔을까? 이제 노래는 고향을 담지 않는다. 나훈아의 노래 '머나먼 고향'은 고향 밀양에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박정웅이 1968년 25세의 나이로 서울로 가서 처음으로 맞이한 추석날 밤, 서울 친구의 골방에서 민족 대 명절 전야를 홀로 보내며 멀리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즉흥적인 서정을 기타 줄에 걸치며 흥얼거리며 만든 노래라 한다. 머나먼 남쪽 하늘 아래 그리운 고향!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갑작스레 도시로 떠밀려와 도시의 외곽을 유령처럼 떠돌던 '도시 유이민'의 유일한 버팀목이고 자랑이었던 그 고향이 추석과 함께 이제 옛 추억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고 했던 추석이 가까워졌다.
/황무현 마산대학교 미디어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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